Thursday, September 20, 2018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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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아영스

2005. 2. 1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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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백만장자였다"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김지형 기자 cankjh@minjog21.com






;사회주의 사회에도 부자가 있다? 일제시기부터 대부호로 불리던 송대관, 그가 현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의 부친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가 들려주는 ‘나의 아버지 송대관’ 이야기. 그는 왜 ‘사회주의 백만장자’라고 불리는 것일까.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을 만나기 위해 숙소인 보통강호텔 1층 로비로 내려갔다.








1층에 있는 은방울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쁜 송성희 지배인을 기자 일행의 숙소에서 만나게 된 것은 사정이 있었다.

북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4월 15일, 김 주석 탄생일)’을 앞두고 당시 평양 거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평양안경상점이 들어선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상점 지배인을 인터뷰하려면 당연히 상점으로 가는 게 도리건만, 송 지배인 측에서 극구 사양을 했다. 이유는 ‘보수 공사 중이기 때문에 좀 어지럽기’ 때문이라는 것.

북측 사람들의 정서가 그렇다.

손님에게 기왕이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될텐데 하는 아쉬움도 컸지만 북녘 동포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했다.

송 지배인은 대신 개보수 단장이 끝나면 그때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안경 팔 생각이 없다?

그렇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송성희 지배인. 가만 보니 그녀도 안경을 끼고 있었다.

지배인 선생께서도 안경을 썼는데 눈이 나쁘십니까.


약간. 보호하기 위해서 씁니다. 0.25쯤 됩니다.”
기자 일행은 모두 안경잽이다. 그래서인지 안경상점 지배인과의 인터뷰에 다들 흥미로운 눈치다.

남쪽에서 온 우리들은 다 안경을 썼는데, 평양 시민들의 눈도 점차 나빠지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남자는 마흔일곱살, 여자는 마흔네살부터 로치가 옵니다. 그때부터 2∼3년 어간에 0.75씩 올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점차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노화 치료가 목적인가요?
“예방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상점에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장에 찾아가서도 봉사해줍니다. 과학자들, 대학 교원들을 비롯해서 공장 기업소에도 찾아가 고급 기능공들의 시력도 검토하고 안경 주문을 받아서 해줍니다. 선반, 용접공등과 도로 관리원들, 오물 관리원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봉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예방이 목적이라는 안경상점 지배인. 안경상점 지배인이 어떻게든 안경을 팔 생각은 안하고 예방 운운하다니. 안경을 안파는 쪽으로 유도해서야 장사가 제대로 될까?

“그게 다른 나라와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철학이 있습니다.”

참고로 송성희 안경상점 지배인이 알려주는 눈 좋아지는 비결 하나.
눈이 침침하고 피로할 때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별 하나, 나 하나’를 세기 시작해서 백까지 세면 눈이 좋아진다는 것.

북측의 안경 역사는 1956∼1957년경이다. 그러나 안경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인데 바로 송 지배인의 부친이 안경산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바로 북녘사회에서 ‘사회주의 백만장자’로 불리는 기업인 송대관(1912∼1994)이다.
1959년 김 주석으로부터 ‘인민들이 안경을 많이 요구하고 있으니 안경을 만들라’는 과업을 받고 당시 관장하고 있던 평양공업품생산협동조합을 1961년 광학유리생산협동조합으로 개칭하면서 안경알과 각종 렌즈, 유리제품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해 100만 개의 안경 생산을 달성하기도 했다는 것.

김 주석은 송대관 씨가 생산한 안경을 각별히 칭찬했다고 한다. 그가 1984년 유럽지역을 방문할 때 쓴 안경이 바로 송대관 씨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꾼들이 유럽 여러나라에서 생산한 안경을 권했는데 김 주석은 ‘송 동무가 만든 안경을 쓰고 가야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은 송성희 지배인.

그녀가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는 안경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북의 경제사라고 해야할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일제시기부터 북녘 땅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알려진 송대관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탁발승의 아들이었다. 탁발승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도 회덕군, 그런 그가 떠돌다가 정착하게 된 곳이 지금의 평남 숙천군 부근이었다.

샘터의 한 여인에게 물을 얻어마시다가 넋이 빼앗겨 스님의 계율을 어기고 여인을 보쌈해다가 함께 살았다.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바로 송대관이다.

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영변의 숭덕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 사과나무 40그루를 가지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서운 절약가였던 그는 도매업을 하면서 기반을 닦아 나갔다.

1935년 김태복과 결혼했는데 부인의 아버지는 당시 목사 신분이었다. 말하자면 승려의 아들과 목사의 딸이 결혼한 셈이다.

부부는 기업활동을 위해 평양으로 옮겨 정미업을 시작했고, 이어 메이야스업과 도매업에 치중해 많은 돈을 벌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이르면서 기업활동이 피폐해질 때쯤, 8·15광복이 찾아왔다.

공산당이 온갖 자본을 청산하고 네 것, 내 것이 없이 공유한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더니 자산가들을 위협, 공강하고 오라를 지어 끌어가기 시작했다. 송대관 씨도 무사할 리 없었다.



삼천리표 연필공장

그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가서 기업활동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두 척의 기계배를 세 내어 시멘트와 황금태(물엿) 등을 가득 싣고 떠났다. 감추어 두었던 금덩어리도 실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짐들을 서울로 날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38선 남쪽을 점령하고 있던 미 군정청에서 그가 적산물자(점령지 재산)를 빼돌렸다고 체포령을 내린 것이다.

북에서 도망쳐 온 그는 남쪽에서도 도망자 신세가 되자 절망에 빠졌다.

결국 그는 다시 북행길에 올랐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다.

당시 부친의 심정을 딸인 송성희 지배인은 이렇게 전한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님의 조국개선 방송연설을 우연히 들으신 거예요.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는 호소를 들었던 겁니다. 특히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이바지해야 한다는 연설이 아버지의 가슴을 울렸다고 합니다.”

북으로 돌아간 그는 그 후 연필 공장을 지었다. 그가 연필 공장을 세운 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딸의 표현대로 “돈을 떠난 기업가(아버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당시 이북 사회의 요구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갔다. 해방 직후 문맹퇴치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 주석이 직접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일성 위원장은 그 직후인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첫 번째 의정으로 연필문제를 상정했다.

보통강 기슭에 세운 평양연필공장은 그렇게 생산량이 늘어나고 돈도 쌓여갔다. 그때 생산한 연필이 ‘삼천리표’ 연필이었다.

그후 송대관은 공장을 나라에 넘겨주었다. 목재와 흑연 등 주원료를 강계지역에서 수송해 와야 했으므로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현지에 넘긴 것이다. 대신 초자업(유리기구 생산업)과 고무업에 달라붙었다.

당시 유리제품과 신발 등이 크게 부족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돈 소나기가 쏟아졌다. 돈이 돈을 낳고 새끼를 쳐서 ‘돈 낟가리’에 올라설 정도였다는 것.
그때 갑자기 전쟁이 터졌다.

이때부터 송대관은 그동안 번 돈을 나라를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그의 딸 송 지배인의 말이다.
“그때 김일성 원수님을 접견한 아버지가 그랬다고 합니다. ‘나라를 잃고서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으면 뭐합니까’라고. 수시로 식량을 사들여 공장 노동자들과 전재민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전쟁 시기 아버지가 나라에 헌납한 돈은 당시 금액으로 515만 원이었습니다.”그로 인해 송대관은 ‘애국적 상공인’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전후 복구 시기, 기업인으로서의 그의 자질은 또 한번 드러났다.

당시는 기계설비들이 없어서 쩔쩔매던 때였다. 그는 전후 복구로 북쪽 사회가 땀을 흘리던 시기, 어이없게도 대동강에서 수영과 잠수를 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원산 앞바다에 적들의 배가 여러 척 침몰돼 있다는 얘길 듣고 그 배들에서 요긴한 기계 설비들을 찾아내기 위해 수영을 연습했습니다. 마침내 꼭 필요한 발동기를 찾아내 건져 올렸습니다.”공장은 재빨리 복구되기 시작했고, 금방 종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의사 버리고 아버지의 뒤를 잇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개인 기업가였다.

그러나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채택된 ‘자본주의적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방침’ 이후 그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지닌 전재산 500만 원을 전부 헌납하고 평양공업품생산협동조합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유리 관련 물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안경 제조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이후 그는 주체사상탑의 봉화 유리 생산을 맡는 등 평양 건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다.

그가 74세 되던 해, 어느날 ‘자신의 일을 이어갈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습을 본 딸 송성희 씨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조선혁명박물관 진료소 의사였다. 그의 오빠들도 모두 의사였다. 그녀의 회고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작정 모란편의조합에서 안경 수리공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봉사를 하다보니 개선안경수리소라는 소박한 상점을 내올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장군님의 배려로 평양안경상점을 내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6개에 달하는 평양안경상점을 총괄하는 지배인으로 성장했다. 모란봉 기슭 안상택거리에 2층 짜리 번듯한 건물에 안경상점을 차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쁘실까요.”

그의 부친 송대관 선생은 지난 1994년 1월 11일 영면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고인에게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애국렬사릉을 통틀어서 애국적 기업인의 자격으로 그곳에 묻힌 사람은 송대관 선생이 유일하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송대관 선생의 묘. 기업인의 묘는 송 선생이 유일하다.



‘사회주의 백만장자’ 송대관 선생의 딸 송성희 지배인은 현재 평양안경상점을 발판으로 해서 본격적인 대외 무역업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부터 ‘고려심청회사’를 설립, 안경도 팔고 의복류, 식료품, 식당 등과 여성 미용품 생산 및 수출입에 나섰다. 그녀의 꿈은 ‘나라를 위한 조선의 심청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2004년 7월호]






2004년 07월 01일 (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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