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의 향원익청] 왜 사느냐고 물으려거든…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등록 :2017-07-18 18:13수정 :2017-07-18 19:13
전주교구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지정환’이란 한국 이름을 얻었고,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부안은 평야지대였지만,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간척 공사에 뛰어들었다.
“어떤 나무건 척박한 땅에선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다. 물과 거름이 있어야 뿌리도 내리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 “…” 때론 슬펐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부안에서도 그랬고, 임실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고통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되었다.
“제가 상을 받았습니다.” “누구 덕인지 아느냐?”
2002년 호암상(사회봉사 부문) 시상식에서 지정환 신부는 수상 소감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시작했다.
“40여년간 죽을 고생을 한 제게 주는 상 아니겠습니까?”
“왜 그리 어리석으냐.”
“제가 겪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잊으셨습니까?”
“그러면 네가 그동안 범한 숱한 시행착오와 실수들을 잊었느냐.”
“(부안에서) 간척 사업을 할 때 둑을 쌓기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
벨기에 출신의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예비 신학생 시절 극장 뉴스를 통해 한국전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는 독립한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큰 비극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한 건 그때였다. 1958년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언제 전쟁이 재연할지 모르는데….’ ‘그러니 할 일이 더 많지 않을까요?’
전주교구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지정환’이란 한국 이름을 얻었고,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부안은 평야지대였지만,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간척 공사에 뛰어들었다. 참가자들에게는 간척지 1정보(3000평)씩 나눠주기로 하고, 기증받은 밀가루를 품삯으로 지급했다. 지게와 손수레로 흙과 돌을 날라 쏟아붓고, 태풍에 쓸려나가면 다시 날라 쏟아붓기를 3년, 그는 100정보의 땅을 확보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던 해부터 설사와 복통이 심했다. ‘음식과 물이 바뀌어서 그러려니…’ 했다. 간척 공사를 할 때는 부족한 재정 때문에 식사 도우미까지 내보냈다. 성당 인근의 중국집에서 하루 두 끼 자장면 등으로 때웠다. 간척이 끝날 때쯤 그의 담낭(쓸개)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담낭을 제거하고 요양차 벨기에로 갔다가 6개월 만에 서둘러 돌아왔다. 농부들과 땅이 궁금했다. 하지만 땅을 받은 농부들은 한 명도 없었다. 땅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이었다. ‘쓸개까지 버려가며 모든 걸 다 쏟았는데….’ 절망스러웠다. “다시는 한국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몰랐다. 가난은 농부들이 간척지에서 염분이 빠지기까지 4~5년을 기다릴 수 없게 했다.
“그래, 너 혼자서 공장도 세우고, 소젖도 짜고, 치즈도 혼자 만들었느냐. 함께 했던 농민들에게 우유 값을 제대로 지불했느냐,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르느냐….” “그분들께는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전주교구는 실의에 빠진 그를 ‘별로 할 일 없는’ 임실로 발령 냈다. 임실은 군청 소재지에도 고등학교 하나 없는, 전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 노령산맥에 걸터앉은 산악지대여서 땅도 적고 척박했다. 기관장 모임에서 임실 군수는 이런 부탁을 했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 꼭 남겨 주십시오.”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조금만 개입하자.” 마침 부안에서 임실로 이주한 신태근씨가 마을 청년들과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내 서랍 속에서 뒹굴면 아무것도 아닌 동전이지만, 모이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1호 조합원이 되어 조합 설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이 없는데 돈이 모이면 뭐 할까? 어느 날 그는 청년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다. 키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의 보물이 저기에 있습니다.” 소 돼지도 먹지 못하는 풀이 어떻게 보물일까, 청년들은 의아했다. “소 돼지는 먹지 못하지만 산양은 잘 먹습니다. 산양유는 환자들이 먹는 최고급 영양식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시간 부자 아닙니까?” 조합원 12명의 산양협동조합은 그때 탄생했다.
하지만 산양유는 판로가 한정돼 있었다. 약으로나 간주됐으니 일반인은 외면했다. “남는 산양유로 치즈나 만들어볼까?” 그는 1966년 치즈 제조에 착수했다. 조합원에게 줄 산양유 대금은 벨기에 가족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이나 축의금 등으로 때웠다. 그러나 3년 가까이 되도록 치즈는 나오지 않았다. 산양유 대금도 몇 달치씩 밀렸고, 조합원들은 흔들렸다. 1969년 그는 불쑥 유럽으로 떠났다. 제조기술을 배우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공장을 다녔지만 결정적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애가 탈 무렵 한 귀인이 나타났다. 하느님도 기겁할 골수 공산주의 청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의 비서라는 그 청년은 제조 비법이 담긴 노트를 통째로 건네줬다.
돌아왔을 때 기다리는 건 빈 공장뿐이었다. 조합엔 신태근씨만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석 달을 넘기지 못한다니….”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배운 대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정한치즈’(프랑스식 포르살뤼 치즈)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성가치즈’(체더치즈)가 탄생했다.
판로가 문제였다. 1971년 그는 체더치즈 한 덩이를 들고 무작정 조선호텔 독일인 주방장을 찾아갔다. 귀찮아하던 주방장은 한 조각을 먹어보더니 반색을 하며 70킬로 납품을 요청했다. 이듬해엔 서울에 생긴 한국 최초의 피자 가게에 납품할 모차렐라 치즈도 생산했다. 생산과 판로가 안정되자 그는 한 젊은이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임실치즈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공장과 생산 시설 일체를 조합에 귀속시켰다.
“무지개가족만 해도 그렇다. 욕창은 누가 치료하고, 누가 목욕시켰느냐. 최근에 화장실 청소라도 한 기억이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지 신부는 1970년초부터 오른발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며칠씩 그러다가 사라졌다. 피곤 때문이려니 했다. 1976년엔 한 번 발작하면 걸을 수조차 없었다. 다발성신경경화증이었다. 그해 12월 정밀진단과 치료를 받기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불치’ 진단을 받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박정희 군사독재와 가장 적극적으로 맞선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추방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 장애에 더해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다. 1981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벨기에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만에 돌아왔다. 전주교구는 그에게 장애인 사목을 권했다.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가족이었다. 이리 성모병원에서 시작해 전주의 28평형 전세 아파트로 옮겨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가족이 많아지면서 천주교 사회복지회 건물로 옮겼다. 지금의 ‘무지개가족’이 탄생한 곳이다. 1989년 11월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지하 35평, 지상 240평 규모의 무지개가족 보금자리가 생겼고, 2년 뒤엔 건평 305평의 제2 무지개가족의 집이 탄생했다.
장애인과 생활할 때 그는 자기 전 물을 과음했다. 소변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깨어 장애인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대신 하지 않았다. 코라도 만질 수 있으면 귀도 머리도 만질 수 있고,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장애인들은 그것을 스스로 키워나갈 수 있다! 그는 장애인이 된 것을 감사했다.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나무건 척박한 땅에선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다. 물과 거름이 있어야 뿌리도 내리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 “…”
때론 슬펐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부안에서도 그랬고, 임실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고통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되었다. 농촌 사역, 신협, 장애인 사역 등. 임실치즈가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그의 이름과 초상을 거저 사용하려 해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렸다. ‘신부가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따위의 험담이 쏟아졌다. 논란을 없애기 위해 정식으로 로열티 계약을 맺었고,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 장학재단의 밑돌이 되었다. 자신이 이룬 모든 일에서 손을 뗀 그는 지금 한국천주교 초기 사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물과 거름이 다 있었습니다.”
(*그동안 ‘향원익청’을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년과 함께 연재도 마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1957@naver.com
연재곽병찬의 향원익청
[곽병찬의 향원익청] 왜 사느냐고 물으려거든…
[곽병찬의 향원익청] 우파여, 이 사람을 보라
[곽병찬의 향원익청] 우리 소리의 위대한 조연
[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
[곽병찬의 향원익청] 녹천은 칼, 춘강은 펜을 드니 제봉가 충절 드높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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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님
정년이시라니 많이 섭섭합니다.
향원익청 오래도록 잘 읽어왔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한겨레신문을 스승이라 여기고 거의 30년을 함께한 창간독자 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자주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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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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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많은 사람이 모르는 역사적사실을 발굴하여 올리시는 대기자님의 박식에, 주1회 나오는 향원익청을 잘 봤는데 정년과 함께 이 난에서 절필이라니 엄청 아쉽습니다,한겨레 창간독자로써 한겨레가 창간에 비하면 많이 붓이 무뎌졌다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그래도 곽대기자님 같은 분이 있어 한겨레가 빛나고, 독자의 힘이란게 미미하지만 밀어 드려야 하겠다 다짐합니다만...한겨레를 떠나시드라도 가능한 글을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대기자님 앞날에 영광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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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quire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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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겨레신문 연재 중에서 향원익청을 가장 사랑하는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연재 중단 소식이 너무 섭섭합니다.
그간 좋은 글 읽게 해주신 곽병찬 대기자님께 너무 감사드리며
정년과 상관없이 연재는 계속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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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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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대한 답변은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님의 글 읽고 보니, 저도 마음이 쬐끔 흔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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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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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이메일 주소가 벌써 네이버로 바뀌었네요.
뛰어난 통찰과 문장으로 지금부터 더욱 더 활발하게 독자들에게 좋은 글을 써 주셔야 할 때인데...
너무 슬프고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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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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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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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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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시는데 정년이라니... 안됩니다.
향원익청 연재 계속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3321.html#csidx96911b093cbc1508c983fc893a924bc
벨기에 출신의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예비 신학생 시절 극장 뉴스를 통해 한국전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는 독립한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큰 비극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한 건 그때였다. 1958년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언제 전쟁이 재연할지 모르는데….’ ‘그러니 할 일이 더 많지 않을까요?’
전주교구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지정환’이란 한국 이름을 얻었고,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부안은 평야지대였지만,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간척 공사에 뛰어들었다. 참가자들에게는 간척지 1정보(3000평)씩 나눠주기로 하고, 기증받은 밀가루를 품삯으로 지급했다. 지게와 손수레로 흙과 돌을 날라 쏟아붓고, 태풍에 쓸려나가면 다시 날라 쏟아붓기를 3년, 그는 100정보의 땅을 확보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던 해부터 설사와 복통이 심했다. ‘음식과 물이 바뀌어서 그러려니…’ 했다. 간척 공사를 할 때는 부족한 재정 때문에 식사 도우미까지 내보냈다. 성당 인근의 중국집에서 하루 두 끼 자장면 등으로 때웠다. 간척이 끝날 때쯤 그의 담낭(쓸개)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담낭을 제거하고 요양차 벨기에로 갔다가 6개월 만에 서둘러 돌아왔다. 농부들과 땅이 궁금했다. 하지만 땅을 받은 농부들은 한 명도 없었다. 땅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이었다. ‘쓸개까지 버려가며 모든 걸 다 쏟았는데….’ 절망스러웠다. “다시는 한국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몰랐다. 가난은 농부들이 간척지에서 염분이 빠지기까지 4~5년을 기다릴 수 없게 했다.
“그래, 너 혼자서 공장도 세우고, 소젖도 짜고, 치즈도 혼자 만들었느냐. 함께 했던 농민들에게 우유 값을 제대로 지불했느냐,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르느냐….” “그분들께는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전주교구는 실의에 빠진 그를 ‘별로 할 일 없는’ 임실로 발령 냈다. 임실은 군청 소재지에도 고등학교 하나 없는, 전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 노령산맥에 걸터앉은 산악지대여서 땅도 적고 척박했다. 기관장 모임에서 임실 군수는 이런 부탁을 했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 꼭 남겨 주십시오.”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조금만 개입하자.” 마침 부안에서 임실로 이주한 신태근씨가 마을 청년들과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내 서랍 속에서 뒹굴면 아무것도 아닌 동전이지만, 모이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1호 조합원이 되어 조합 설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이 없는데 돈이 모이면 뭐 할까? 어느 날 그는 청년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다. 키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의 보물이 저기에 있습니다.” 소 돼지도 먹지 못하는 풀이 어떻게 보물일까, 청년들은 의아했다. “소 돼지는 먹지 못하지만 산양은 잘 먹습니다. 산양유는 환자들이 먹는 최고급 영양식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시간 부자 아닙니까?” 조합원 12명의 산양협동조합은 그때 탄생했다.
하지만 산양유는 판로가 한정돼 있었다. 약으로나 간주됐으니 일반인은 외면했다. “남는 산양유로 치즈나 만들어볼까?” 그는 1966년 치즈 제조에 착수했다. 조합원에게 줄 산양유 대금은 벨기에 가족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이나 축의금 등으로 때웠다. 그러나 3년 가까이 되도록 치즈는 나오지 않았다. 산양유 대금도 몇 달치씩 밀렸고, 조합원들은 흔들렸다. 1969년 그는 불쑥 유럽으로 떠났다. 제조기술을 배우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공장을 다녔지만 결정적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애가 탈 무렵 한 귀인이 나타났다. 하느님도 기겁할 골수 공산주의 청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의 비서라는 그 청년은 제조 비법이 담긴 노트를 통째로 건네줬다.
돌아왔을 때 기다리는 건 빈 공장뿐이었다. 조합엔 신태근씨만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석 달을 넘기지 못한다니….”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배운 대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정한치즈’(프랑스식 포르살뤼 치즈)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성가치즈’(체더치즈)가 탄생했다.
판로가 문제였다. 1971년 그는 체더치즈 한 덩이를 들고 무작정 조선호텔 독일인 주방장을 찾아갔다. 귀찮아하던 주방장은 한 조각을 먹어보더니 반색을 하며 70킬로 납품을 요청했다. 이듬해엔 서울에 생긴 한국 최초의 피자 가게에 납품할 모차렐라 치즈도 생산했다. 생산과 판로가 안정되자 그는 한 젊은이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임실치즈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공장과 생산 시설 일체를 조합에 귀속시켰다.
“무지개가족만 해도 그렇다. 욕창은 누가 치료하고, 누가 목욕시켰느냐. 최근에 화장실 청소라도 한 기억이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지 신부는 1970년초부터 오른발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며칠씩 그러다가 사라졌다. 피곤 때문이려니 했다. 1976년엔 한 번 발작하면 걸을 수조차 없었다. 다발성신경경화증이었다. 그해 12월 정밀진단과 치료를 받기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불치’ 진단을 받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박정희 군사독재와 가장 적극적으로 맞선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추방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 장애에 더해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다. 1981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벨기에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만에 돌아왔다. 전주교구는 그에게 장애인 사목을 권했다.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가족이었다. 이리 성모병원에서 시작해 전주의 28평형 전세 아파트로 옮겨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가족이 많아지면서 천주교 사회복지회 건물로 옮겼다. 지금의 ‘무지개가족’이 탄생한 곳이다. 1989년 11월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지하 35평, 지상 240평 규모의 무지개가족 보금자리가 생겼고, 2년 뒤엔 건평 305평의 제2 무지개가족의 집이 탄생했다.
장애인과 생활할 때 그는 자기 전 물을 과음했다. 소변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깨어 장애인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대신 하지 않았다. 코라도 만질 수 있으면 귀도 머리도 만질 수 있고,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장애인들은 그것을 스스로 키워나갈 수 있다! 그는 장애인이 된 것을 감사했다.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나무건 척박한 땅에선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다. 물과 거름이 있어야 뿌리도 내리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 “…”
때론 슬펐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부안에서도 그랬고, 임실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고통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되었다. 농촌 사역, 신협, 장애인 사역 등. 임실치즈가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그의 이름과 초상을 거저 사용하려 해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렸다. ‘신부가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따위의 험담이 쏟아졌다. 논란을 없애기 위해 정식으로 로열티 계약을 맺었고,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 장학재단의 밑돌이 되었다. 자신이 이룬 모든 일에서 손을 뗀 그는 지금 한국천주교 초기 사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물과 거름이 다 있었습니다.”
(*그동안 ‘향원익청’을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년과 함께 연재도 마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1957@naver.com
연재곽병찬의 향원익청
[곽병찬의 향원익청] 왜 사느냐고 물으려거든…
[곽병찬의 향원익청] 우파여, 이 사람을 보라
[곽병찬의 향원익청] 우리 소리의 위대한 조연
[곽병찬의 향원익청] “중립의 초례청” 꿈꾸는 조강 중립수역
[곽병찬의 향원익청] 녹천은 칼, 춘강은 펜을 드니 제봉가 충절 드높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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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님
정년이시라니 많이 섭섭합니다.
향원익청 오래도록 잘 읽어왔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한겨레신문을 스승이라 여기고 거의 30년을 함께한 창간독자 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자주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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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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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많은 사람이 모르는 역사적사실을 발굴하여 올리시는 대기자님의 박식에, 주1회 나오는 향원익청을 잘 봤는데 정년과 함께 이 난에서 절필이라니 엄청 아쉽습니다,한겨레 창간독자로써 한겨레가 창간에 비하면 많이 붓이 무뎌졌다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그래도 곽대기자님 같은 분이 있어 한겨레가 빛나고, 독자의 힘이란게 미미하지만 밀어 드려야 하겠다 다짐합니다만...한겨레를 떠나시드라도 가능한 글을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대기자님 앞날에 영광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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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quire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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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겨레신문 연재 중에서 향원익청을 가장 사랑하는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연재 중단 소식이 너무 섭섭합니다.
그간 좋은 글 읽게 해주신 곽병찬 대기자님께 너무 감사드리며
정년과 상관없이 연재는 계속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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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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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님의 글 읽고 보니, 저도 마음이 쬐끔 흔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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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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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이메일 주소가 벌써 네이버로 바뀌었네요.
뛰어난 통찰과 문장으로 지금부터 더욱 더 활발하게 독자들에게 좋은 글을 써 주셔야 할 때인데...
너무 슬프고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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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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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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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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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시는데 정년이라니... 안됩니다.
향원익청 연재 계속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3321.html#csidx96911b093cbc1508c983fc893a92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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