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0, 2018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 네이버 블로그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 네이버 블로그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아영스

2005. 2. 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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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2003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 종교인들이 남쪽을 방문해 함께 종교의식을 가졌다. ‘북에 종교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불식시킨 좋은 만남이었다. 이번 만남을 통해 우리는 민족 동질성과 평화와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종교의 자리가 넓어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월 2일 오전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열린 남북 공동예배에서 평양 칠골교회 성가대원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북쪽에 종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의문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도 짙게 묻어 있다.
“형태적으로 있다 해도 그건 대외선전용이거나 정치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이도 적지 않다. 과연 그럴까?

지난 3월 1일∼3일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60여 명의 북쪽 종교인 등 105명의 북측 대표단이 ‘2003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이하 3·1 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남쪽 땅을 밟았다.

특히 이들은 대회 기간 동안 분단 이후 최초로 남쪽의 종교시설을 방문해 목탁을 치며 예불을 올렸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에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시일식을 함께 가졌고, 명동성당에서는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위장된 것일까? 남쪽을 방문한 북 종교인들을 통해 북쪽 종교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다.




“‘침묵교회’ 말에 북 교우들 상처받아”

“남쪽에서는 북을 ‘침묵교회’로 표현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말에 북의 교우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3월 2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쉐라톤워커힐 컨벤션센터 1층 무궁화홀에서 열린 남북 가톨릭 성직자와 신도들의 모임에서 쏟아 놓은 장재언 단장의 말이다. 아버지 장 토마스, 어머니 이 소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장 단장은 어릴 때부터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신자가 됐다. 영세명은 사무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장 단장의 고백성사와 같은 말이 이어졌다.

“북은 주체사상 신봉자로 가득 차 있는 사회라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서운 정신적 봉변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고 대담한 이 신앙고백에 대해 자리를 함께 했던 남쪽 종교인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북쪽 종교인들의 고뇌에 대한 토로를 들으며 한 수녀님은 “신앙심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써온 저분들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잣대로만 판단해 온 것이 너무 부끄럽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 단장의 말은 남쪽 일각에서 여전히 북쪽 종교에 대해 의구의 시선을 던지는데 대한 섭섭함의 표출이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님, 문규현 신부님께서 북의 인식을 바꾸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기 전까지 북에서는 종교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정치적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북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다. 봉수교회 손효순 담임목사의 말이다.

“종교인들 중에 일제시대에 친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방 직후엔 반공에 앞장서기도 했죠. 특히 6·25 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습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니까 교회당에는 폭격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해 교회당으로 피신했는데 미군 비행기가 교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경멸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 등 통일문제에 앞장선 종교인들이 북을 방문하면서부터다.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불의에 저항하고 통일에 힘쓰는 헌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이 북쪽 사람들에게 하나둘씩 알려지면서 종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줄었다.

거기에다 남쪽 종교단체를 통한 대북지원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 이들도 생겨났다. 특히 남쪽 종교단체들이 대북 지원을 하면서 북쪽 종교단체에 지정 기탁해 북쪽 종교단체들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신자들의 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백봉일 전도사의 말이다.

“지금 우리의 목표는 주민들을 신앙심과 애국심으로 함께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해도 나라가 있고 조국이 있는 겁니다. 이 둘을 분리시킬 수 없죠. 이를 통해 현재 1만3000명 정도 되는 신자를 1만4000명으로 늘리는 ‘만사(14000)운동’을 전개 중에 있습니다.”

북녘 종교의 활성화는 1998년 9월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 더욱 힘을 받는다. 바뀐 헌법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라고 명시했다.

북은 지난해 9월 발표된 신의주 특구기본법 4장 43조와 46조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 외에도 북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두고 있으며 각 종교별로 교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어두고 있다. 이번에 남쪽을 찾은 종교인들 중에는 이들 학교를 통해 배출된 성직자들이 다수 있었다.

이번에 남쪽을 방문한 북의 종교인들은 조선종교인협의회 소속이다. 조선종교인협의회는 1989년 5월 30일 결성된 조직으로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 4개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3·1민족대회 둘째 날인 3월 2일 이들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쪽 종교시설을 방문해 종교의식을 함께 했다.


남북의 종교예식에 큰 차이는 없었다




서울 삼성동 봉은사 법왕루에서 남북의 불교도들이 삼귀의를 시작으로 합동법회를 하는 모습.[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오전 9시 25분 붉은 장삼을 차려입고 도착한 북녘 불교도 6명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 대웅전 불전 앞에서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다.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쪽 리영호 선사가 목탁을 치자 일행은 경건하게 반야심경을 읊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남쪽 불교인은 자신들의 신행 모습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북의 불교는 남쪽과 같이 조계종을 표방하며 금강경을 주 경전으로 삼고 있다. 또한 불교의 3대 명절인 열반절, 성도절, 석탄일에 기념법회도 여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가 있다면 북쪽의 승려들은 모두 결혼을 할 수 있는 대처승이라는 점이다. 이 대처승은 남쪽 불교 종단에도 있다. 조선불교도연맹은 사회주의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직후인 1973년 8월 생겨났다.

현재 평양의 광법사와 용화사, 개성 관음사 등 60여 개 사찰에 신도수는 1만여 명 정도. 승려는 300명 가량인데 이들은 1989년 설립된 승려교육기관 불교학원에서 배출되고 있다.

간단한 예불 뒤 북쪽 불교인들은 남쪽 스님들과 다례헌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조선불교도연맹 황병준 대선사가 자신의 법명을 ‘금산’이라고 소개했고 이어 북쪽의 다른 불교인들도 차례로 자신의 법명을 대며 합장인사를 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은 “불견 불문 불행이면 부득(못 보고 못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얻을 것도 없다)”이라고 인사말을 건넸고, 황병준 대선사는 “6·15공동선언 후 물꼬가 트여 신뢰가 형성됐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실천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타종식이 끝난 후 법왕루에서 ‘3·1절 기념 조국통일 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열렸다. 법회가 시작되자 북쪽 불교인들은 맨 앞줄에 앉아 경건하게 예불을 올렸다. 법회에 함께 참가했던 김정순 씨는 남북 공동법회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북쪽 분들의 모습을 유심히 봤는데 그들도 신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합장하고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는 모습에서 더욱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 울려 퍼진 〈평화의 기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한 북측 카톨릭 장퉁성당 신자들은 남측 신자들과 함께 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신앙의 일치를 기원했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북쪽 가톨릭 신자들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가했다. 오전 9시 25분 백남용 명동성당 본단 신부의 영접을 받으며 명동성당에 도착한 평양 장충성당 소속 17명의 가톨릭 신자들은 가장 먼저 1839년 기해박해(5명)와 1866년 병인박해(4명) 때 순교한 교인 9명이 안치된 지하당, 순교자 성지 ‘고해소’를 방문했다. 이곳은 18∼19세기 조선에 전파된 가톨릭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당시 박애와 평등을 내세운 가톨릭은 평민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런 가톨릭의 상징인 곳을 방문한 북쪽 신자들은 감정이 복받치는 듯 때로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11시 미사였다. 성단 왼편에 자리잡은 북쪽 신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남쪽 신자들은 복잡한 미사절차를 능숙하게 따라하며 영성체송과 성모송, 사도신경 등 기도송을 나직하게 읊고, 성가를 소리내어 부르는 북쪽 신자들을 보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모처럼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영성체를 받은 북쪽 신자들도 영성체 후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 하나된 민족, 하나된 신앙을 갈망했을 그들이 기도를 끝냈을 때에는 눈가에 물기가 번져있었다.

특히 장충성당 성가대가 특별찬송으로 〈평화의 기도〉를 부르자 남쪽의 할머니 신자들은 연신 눈가로 손을 옮겨갔다. 우리의 신앙과 저들의 신앙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신앙 속에 남북은 하나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선가톨릭교협회는 1988년 6월 결성됐던 조선가톨릭협회가 명칭을 바꿔 1999년에 만들어진 종교단체다. 1988년 9월 평양시 장충동에 세워진 장충성당의 신도 수는 약 800명. 신부와 수녀는 없는 상태다. 우리나라에 처음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 신도가 먼저 생기고 나중에 신부와 수녀가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 때문인지 3월 2일 저녁에 열린 남북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에서 남쪽 종교인들은 북쪽 평양교구에 신부와 수녀를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 북쪽의 의견을 타진했다. 이에 장재언 위원장은 “북쪽에 ‘어머니는 시집가라 하지만 난 아직 말 못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남쪽에서 말씀하시는 바를 잘 알지만 아직 뭐라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명동성당을 보고 반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움트는 사랑은 부인하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현재 북쪽 가톨릭 신자들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10시, 11시 세 차례 미사를 올린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남북 천도교 합동시일식을 마치고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마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남북의 천도교인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한편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 서울교구에서도 북쪽 천도교 인사 6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천도교 합동 시일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철 천도교 교령과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 김방경 대종교 총전교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북쪽의 경우 천도교는 상대적으로 당국의 배려를 받아온 종교이다. 1946년 2월 북쪽 천도교는 조선로동당과 우당 관계에 있는 천도교청우당을 결성했고, 조선천도교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중앙지도위원회 류미영 위원장은 최덕신 선생의 부인으로 지난해 서울 8·15민족공동행사에 참가해 남쪽에 살고 있는 자녀들과 상봉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현재 신자수는 1만5000여 명이며 1986년부터 천도교 기념일의 하나인 천일기념식을 개최한다.




소망교회에서 벌어진 ‘옥의 티’

전체적으로 무난히 치러진 남북 종교행사에서 ‘옥의 티’라면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이었다. 이날 북녘 기독교 신자들도 함께 참석한 예배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오경우 목사가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미국의 핵 위협을 얘기하자 예배당 뒤편에서 “그만 하라”는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소란은 곧 진정되었지만 이를 둘러싼 남쪽 신자들 사이의 논쟁은 예배가 끝나고도 계속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 학담 스님은 “북쪽이 얼마나 그런 문제에 대해 절박하면 그랬겠습니까. 그걸 이해해줘야 하는데 아쉽네요”라고 말했다. 김창수 전 민화협 정책실장도 “남북이 사회제도가 다르듯 남북 종교의 성격도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북쪽 종교인들이 남쪽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북쪽 종교인들은 이번 남쪽 방문을 통해 여러 차례 ‘미국에 의한 전쟁 위협’에 대해 얘기했다. 이에 대해 조선불교도연맹의 리규룡 선사는 “종교인도 같은 민족구성원입니다. 민족의 공멸을 불러올 전쟁만큼은 당연히 함께 막아야지오. 전쟁을 막지 못하면 남북 종교 교류도 길이 막히고 마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남쪽 진각종 통리원장 효암 스님도 의견을 같이 했다.

“어떤 명분의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또한 더 이상 분열도 안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나약한 민족의식도 이제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북 종교인들이 하나되자는 것이 이번 행사의 의미입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남북의 종교인들은 더 가까워졌다. 북쪽의 김명조 선사를 만난 조계종 전형근 과장이 “7∼8년 만에 남쪽에서 같이 법회를 하네요. 지난해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라고 말하자 김 선사는 “서울 오면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선생 집에 가는 일도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명이 같아 더욱 친해진 남북의 종교인들도 있었다. 서재영 조선가톨릭교협회 책임부원과 가톨릭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부산 대표 김현영 신부가 그들이다. 두 사람의 세례명은 ‘마테오’. 이들은 지난 1997년부터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과 지원사업으로 여러 차례 만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차금철 조선불교도연맹 책임부원이 앞으로 원불교에 귀의하기로 했다면서 다음에 만날 때 원불교에서 신도증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민족 동질성 찾아가는 곳에 종교의 자리는 넓어질 것”




3월 2일 밤 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원의 밤’에서 남쪽 7개 종단의 신도들이 유사 이래 최초로 합동 공연을 가졌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그동안 남북 종교간의 지속적인 일치 활동과 남쪽의 헌신적인 지원사업은 남북 종교간의 신뢰를 한층 더 강화했고, 그 성과가 하나둘씩 모이면서 3·1민족대회는 성사될 수 있었다.

또 각 종단별 모임에서는 앞으로 종단별 교류를 더욱 확대 강화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기독교에서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짓는데 힘을 모으기로 했고, 불교에서는 북쪽 사찰의 단청작업을 위해 기술자와 물감을 지원하기로 한 기존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원불교에서는 빵공장을 짓는 지원활동을 계속하기로 했고, 가톨릭에서도 평양에 세운 국수공장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더 힘차게 벌이기로 했다. 기독교 역시 북녘 동포를 위한 밀가루 및 자재 지원에 나선 상태이다.

사실 남쪽 종교인들 중에는 북측을 선교 혹은 포교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들이 많다. 그동안 교세의 확장과 성장 중심의 이러한 왜곡된 종교관이 오히려 남북 종교인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북쪽 종교의 현황과 북쪽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3·1민족대회는 남북 종교교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물론이며 민간통일운동의 전진을 보여주었다.

종교는 자비와 사랑, 화해의 상징이다. 남북의 종교인들이 함께 그러한 종교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종교가 설 자리는 더욱 넓어질 것이며, 통일운동의 지반도 훨씬 넓어져 갈 것이다. 3·1민족대회는 바로 그 가능성을 확인해준 역사적 자리였다. [2003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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