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September 22, 2018

"젊은 기자가 미국 허락받았냐 질문하다니" - 오마이뉴스



"젊은 기자가 미국 허락받았냐 질문하다니" - 오마이뉴스




"젊은 기자가 미국 허락받았냐 질문하다니"[에디터스 초이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일갈
18.09.21 11:31l최종 업데이트 18.09.21 11:50l
조명신(na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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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초이스'는 <오마이뉴스> 사회경제부 에디터들이 선정한 오늘의 말말말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에디터스 초이스 180921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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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의 3차 남북정상회담이 막을 내렸습니다. 온 국민의 시선이 평양으로 쏠렸던 시간 동안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마련된 프레스센터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20일 문재인 대통령도 2700여 명의 내외신 취재진이 등록된 이곳을 찾아 대국민 보고 형식으로 정상회담 성과를 설명했습니다.


이후 여러 방송사에서는 전문가를 불러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해석과 전망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20일 오후 10시 KBS에서 마련한 특집대담 '한반도 평화의 길'에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출연했습니다. 정 전 장관은 미국 눈치 보는 시각에 대해 한 기자의 사례를 들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일갈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늘의 에디터스 초이스입니다.

"오늘 아침에 프레스센터에서 어떤 기자가 질문을 합디다. 윤영찬 수석한테. 내가 놀랐어요. 젊은 기잔데. 지금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합의했는데 이거 미국하고 협의하고 한 겁니까 하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됐어? 아니 남북 간에 정상 간에 우리가 가고 오는 것도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기자라니. 이거 큰일 났어요, 지금. 주인의식을 가져야지요.

우리 국민들이 남북관계를 보는 데 있어서 미국 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현실이니까. 그러나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늘어난다는 사실. 나는 굉장히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들었던 젊은 기자가 아니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을 초청한 것을 미국의 허락을 받았냐 질문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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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20, 2018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 네이버 블로그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 네이버 블로그




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아영스

2005. 2. 1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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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에 신앙심과 애국심 함께 키우는 북녘 종교인들
2003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 종교인들이 남쪽을 방문해 함께 종교의식을 가졌다. ‘북에 종교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불식시킨 좋은 만남이었다. 이번 만남을 통해 우리는 민족 동질성과 평화와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종교의 자리가 넓어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3월 2일 오전 서울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열린 남북 공동예배에서 평양 칠골교회 성가대원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북쪽에 종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의문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도 짙게 묻어 있다.
“형태적으로 있다 해도 그건 대외선전용이거나 정치도구로 쓰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얘기하는 이도 적지 않다. 과연 그럴까?

지난 3월 1일∼3일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비롯한 60여 명의 북쪽 종교인 등 105명의 북측 대표단이 ‘2003 평화와 통일을 위한 3·1 민족대회’(이하 3·1 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남쪽 땅을 밟았다.

특히 이들은 대회 기간 동안 분단 이후 최초로 남쪽의 종교시설을 방문해 목탁을 치며 예불을 올렸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에 참석했다. 천도교에서는 시일식을 함께 가졌고, 명동성당에서는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위장된 것일까? 남쪽을 방문한 북 종교인들을 통해 북쪽 종교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다.




“‘침묵교회’ 말에 북 교우들 상처받아”

“남쪽에서는 북을 ‘침묵교회’로 표현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말에 북의 교우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3월 2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쉐라톤워커힐 컨벤션센터 1층 무궁화홀에서 열린 남북 가톨릭 성직자와 신도들의 모임에서 쏟아 놓은 장재언 단장의 말이다. 아버지 장 토마스, 어머니 이 소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장 단장은 어릴 때부터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신자가 됐다. 영세명은 사무엘. 조선가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장 단장의 고백성사와 같은 말이 이어졌다.

“북은 주체사상 신봉자로 가득 차 있는 사회라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서운 정신적 봉변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고 대담한 이 신앙고백에 대해 자리를 함께 했던 남쪽 종교인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북쪽 종교인들의 고뇌에 대한 토로를 들으며 한 수녀님은 “신앙심을 지켜나가기 위해 애써온 저분들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잣대로만 판단해 온 것이 너무 부끄럽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 단장의 말은 남쪽 일각에서 여전히 북쪽 종교에 대해 의구의 시선을 던지는데 대한 섭섭함의 표출이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님, 문규현 신부님께서 북의 인식을 바꾸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기 전까지 북에서는 종교활동을 공개적으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한 이유는 정치적인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북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었다. 봉수교회 손효순 담임목사의 말이다.

“종교인들 중에 일제시대에 친일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방 직후엔 반공에 앞장서기도 했죠. 특히 6·25 때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습니다. 미국이 기독교 국가니까 교회당에는 폭격을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해 교회당으로 피신했는데 미군 비행기가 교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경멸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바뀌게 된 것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 등 통일문제에 앞장선 종교인들이 북을 방문하면서부터다. 감옥에 끌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불의에 저항하고 통일에 힘쓰는 헌신적인 종교인들의 모습이 북쪽 사람들에게 하나둘씩 알려지면서 종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줄었다.

거기에다 남쪽 종교단체를 통한 대북지원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종교에 대한 호감을 가지는 이들도 생겨났다. 특히 남쪽 종교단체들이 대북 지원을 하면서 북쪽 종교단체에 지정 기탁해 북쪽 종교단체들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신자들의 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백봉일 전도사의 말이다.

“지금 우리의 목표는 주민들을 신앙심과 애국심으로 함께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해도 나라가 있고 조국이 있는 겁니다. 이 둘을 분리시킬 수 없죠. 이를 통해 현재 1만3000명 정도 되는 신자를 1만4000명으로 늘리는 ‘만사(14000)운동’을 전개 중에 있습니다.”

북녘 종교의 활성화는 1998년 9월 개정된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 더욱 힘을 받는다. 바뀐 헌법에서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건물을 짓거나 종교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라고 명시했다.

북은 지난해 9월 발표된 신의주 특구기본법 4장 43조와 46조에서도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 외에도 북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과를 두고 있으며 각 종교별로 교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들어두고 있다. 이번에 남쪽을 찾은 종교인들 중에는 이들 학교를 통해 배출된 성직자들이 다수 있었다.

이번에 남쪽을 방문한 북의 종교인들은 조선종교인협의회 소속이다. 조선종교인협의회는 1989년 5월 30일 결성된 조직으로 조선불교도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가톨릭교협회,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 4개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3·1민족대회 둘째 날인 3월 2일 이들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쪽 종교시설을 방문해 종교의식을 함께 했다.


남북의 종교예식에 큰 차이는 없었다




서울 삼성동 봉은사 법왕루에서 남북의 불교도들이 삼귀의를 시작으로 합동법회를 하는 모습.[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오전 9시 25분 붉은 장삼을 차려입고 도착한 북녘 불교도 6명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 대웅전 불전 앞에서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렸다.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쪽 리영호 선사가 목탁을 치자 일행은 경건하게 반야심경을 읊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남쪽 불교인은 자신들의 신행 모습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북의 불교는 남쪽과 같이 조계종을 표방하며 금강경을 주 경전으로 삼고 있다. 또한 불교의 3대 명절인 열반절, 성도절, 석탄일에 기념법회도 여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이가 있다면 북쪽의 승려들은 모두 결혼을 할 수 있는 대처승이라는 점이다. 이 대처승은 남쪽 불교 종단에도 있다. 조선불교도연맹은 사회주의 헌법에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직후인 1973년 8월 생겨났다.

현재 평양의 광법사와 용화사, 개성 관음사 등 60여 개 사찰에 신도수는 1만여 명 정도. 승려는 300명 가량인데 이들은 1989년 설립된 승려교육기관 불교학원에서 배출되고 있다.

간단한 예불 뒤 북쪽 불교인들은 남쪽 스님들과 다례헌에서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조선불교도연맹 황병준 대선사가 자신의 법명을 ‘금산’이라고 소개했고 이어 북쪽의 다른 불교인들도 차례로 자신의 법명을 대며 합장인사를 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은 “불견 불문 불행이면 부득(못 보고 못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얻을 것도 없다)”이라고 인사말을 건넸고, 황병준 대선사는 “6·15공동선언 후 물꼬가 트여 신뢰가 형성됐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실천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타종식이 끝난 후 법왕루에서 ‘3·1절 기념 조국통일 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가 열렸다. 법회가 시작되자 북쪽 불교인들은 맨 앞줄에 앉아 경건하게 예불을 올렸다. 법회에 함께 참가했던 김정순 씨는 남북 공동법회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북쪽 분들의 모습을 유심히 봤는데 그들도 신심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합장하고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는 모습에서 더욱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 울려 퍼진 〈평화의 기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한 북측 카톨릭 장퉁성당 신자들은 남측 신자들과 함께 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신앙의 일치를 기원했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북쪽 가톨릭 신자들도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가했다. 오전 9시 25분 백남용 명동성당 본단 신부의 영접을 받으며 명동성당에 도착한 평양 장충성당 소속 17명의 가톨릭 신자들은 가장 먼저 1839년 기해박해(5명)와 1866년 병인박해(4명) 때 순교한 교인 9명이 안치된 지하당, 순교자 성지 ‘고해소’를 방문했다. 이곳은 18∼19세기 조선에 전파된 가톨릭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당시 박애와 평등을 내세운 가톨릭은 평민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됐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런 가톨릭의 상징인 곳을 방문한 북쪽 신자들은 감정이 복받치는 듯 때로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도 있었다.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은 11시 미사였다. 성단 왼편에 자리잡은 북쪽 신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남쪽 신자들은 복잡한 미사절차를 능숙하게 따라하며 영성체송과 성모송, 사도신경 등 기도송을 나직하게 읊고, 성가를 소리내어 부르는 북쪽 신자들을 보면서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모처럼 신부님으로부터 직접 영성체를 받은 북쪽 신자들도 영성체 후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 하나된 민족, 하나된 신앙을 갈망했을 그들이 기도를 끝냈을 때에는 눈가에 물기가 번져있었다.

특히 장충성당 성가대가 특별찬송으로 〈평화의 기도〉를 부르자 남쪽의 할머니 신자들은 연신 눈가로 손을 옮겨갔다. 우리의 신앙과 저들의 신앙이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신앙 속에 남북은 하나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선가톨릭교협회는 1988년 6월 결성됐던 조선가톨릭협회가 명칭을 바꿔 1999년에 만들어진 종교단체다. 1988년 9월 평양시 장충동에 세워진 장충성당의 신도 수는 약 800명. 신부와 수녀는 없는 상태다. 우리나라에 처음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 신도가 먼저 생기고 나중에 신부와 수녀가 들어온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 때문인지 3월 2일 저녁에 열린 남북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에서 남쪽 종교인들은 북쪽 평양교구에 신부와 수녀를 파견하는 문제에 대해 북쪽의 의견을 타진했다. 이에 장재언 위원장은 “북쪽에 ‘어머니는 시집가라 하지만 난 아직 말 못해’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남쪽에서 말씀하시는 바를 잘 알지만 아직 뭐라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명동성당을 보고 반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움트는 사랑은 부인하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현재 북쪽 가톨릭 신자들은 매주 일요일 오전 9시, 10시, 11시 세 차례 미사를 올린다.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서 남북 천도교 합동시일식을 마치고 천도교를 상징하는 ‘궁을마크’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남북의 천도교인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한편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 서울교구에서도 북쪽 천도교 인사 6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천도교 합동 시일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철 천도교 교령과 민족종교협의회 한양원 회장, 김방경 대종교 총전교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북쪽의 경우 천도교는 상대적으로 당국의 배려를 받아온 종교이다. 1946년 2월 북쪽 천도교는 조선로동당과 우당 관계에 있는 천도교청우당을 결성했고, 조선천도교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중앙지도위원회 류미영 위원장은 최덕신 선생의 부인으로 지난해 서울 8·15민족공동행사에 참가해 남쪽에 살고 있는 자녀들과 상봉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현재 신자수는 1만5000여 명이며 1986년부터 천도교 기념일의 하나인 천일기념식을 개최한다.




소망교회에서 벌어진 ‘옥의 티’

전체적으로 무난히 치러진 남북 종교행사에서 ‘옥의 티’라면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이었다. 이날 북녘 기독교 신자들도 함께 참석한 예배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오경우 목사가 인사말을 하는 가운데 미국의 핵 위협을 얘기하자 예배당 뒤편에서 “그만 하라”는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소란은 곧 진정되었지만 이를 둘러싼 남쪽 신자들 사이의 논쟁은 예배가 끝나고도 계속됐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 학담 스님은 “북쪽이 얼마나 그런 문제에 대해 절박하면 그랬겠습니까. 그걸 이해해줘야 하는데 아쉽네요”라고 말했다. 김창수 전 민화협 정책실장도 “남북이 사회제도가 다르듯 남북 종교의 성격도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북쪽 종교인들이 남쪽과 똑같이 행동하기를 바래서는 안됩니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북쪽 종교인들은 이번 남쪽 방문을 통해 여러 차례 ‘미국에 의한 전쟁 위협’에 대해 얘기했다. 이에 대해 조선불교도연맹의 리규룡 선사는 “종교인도 같은 민족구성원입니다. 민족의 공멸을 불러올 전쟁만큼은 당연히 함께 막아야지오. 전쟁을 막지 못하면 남북 종교 교류도 길이 막히고 마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남쪽 진각종 통리원장 효암 스님도 의견을 같이 했다.

“어떤 명분의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또한 더 이상 분열도 안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나약한 민족의식도 이제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남북 종교인들이 하나되자는 것이 이번 행사의 의미입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남북의 종교인들은 더 가까워졌다. 북쪽의 김명조 선사를 만난 조계종 전형근 과장이 “7∼8년 만에 남쪽에서 같이 법회를 하네요. 지난해만 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라고 말하자 김 선사는 “서울 오면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는데 선생 집에 가는 일도 멀지 않았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명이 같아 더욱 친해진 남북의 종교인들도 있었다. 서재영 조선가톨릭교협회 책임부원과 가톨릭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부산 대표 김현영 신부가 그들이다. 두 사람의 세례명은 ‘마테오’. 이들은 지난 1997년부터 남북 종교인들의 모임과 지원사업으로 여러 차례 만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차금철 조선불교도연맹 책임부원이 앞으로 원불교에 귀의하기로 했다면서 다음에 만날 때 원불교에서 신도증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민족 동질성 찾아가는 곳에 종교의 자리는 넓어질 것”




3월 2일 밤 워커힐호텔 제이드가든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원의 밤’에서 남쪽 7개 종단의 신도들이 유사 이래 최초로 합동 공연을 가졌다.[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그동안 남북 종교간의 지속적인 일치 활동과 남쪽의 헌신적인 지원사업은 남북 종교간의 신뢰를 한층 더 강화했고, 그 성과가 하나둘씩 모이면서 3·1민족대회는 성사될 수 있었다.

또 각 종단별 모임에서는 앞으로 종단별 교류를 더욱 확대 강화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기독교에서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을 짓는데 힘을 모으기로 했고, 불교에서는 북쪽 사찰의 단청작업을 위해 기술자와 물감을 지원하기로 한 기존의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원불교에서는 빵공장을 짓는 지원활동을 계속하기로 했고, 가톨릭에서도 평양에 세운 국수공장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더 힘차게 벌이기로 했다. 기독교 역시 북녘 동포를 위한 밀가루 및 자재 지원에 나선 상태이다.

사실 남쪽 종교인들 중에는 북측을 선교 혹은 포교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들이 많다. 그동안 교세의 확장과 성장 중심의 이러한 왜곡된 종교관이 오히려 남북 종교인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북쪽 종교의 현황과 북쪽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3·1민족대회는 남북 종교교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은 물론이며 민간통일운동의 전진을 보여주었다.

종교는 자비와 사랑, 화해의 상징이다. 남북의 종교인들이 함께 그러한 종교 본연의 모습을 지켜나갈 때 종교가 설 자리는 더욱 넓어질 것이며, 통일운동의 지반도 훨씬 넓어져 갈 것이다. 3·1민족대회는 바로 그 가능성을 확인해준 역사적 자리였다. [2003년 4월호]






자부심 강한 북녘의 해설강사들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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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 강한 북녘의 해설강사들

아영스

2005. 2. 1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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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동포들에게 설명할 때가 가장 신명납니다”
자부심 강한 북녘의 해설강사들





김기헌 기자 kh@minjog21.com






북의 유적지와 명소를 방문했을 때 꼭 만나게 되는 북녘의 여성 해설강사들. 구수한 말솜씨로 손님에게 하나라도 더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남쪽 방문객들이 많다. 자부심 강한 북녘의 해설강사들을 만나 보았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 뵙게돼 반갑습니다.”
“공화국에 자주 오시나 봅니다.”
“대학은 사적학과를 나오셨습니까?”
“저는 김철주사범대학에서 혁명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만경대 해설강사 한명실 씨.[사진/유수]

지난 2월 22일 평양 대동강의 쑥섬을 방문했을 때 만난 그곳의 해설강사와 나눈 대화 중 일부다. 검은 치마, 하얀 저고리, 호리호리한 체격 등 전형적인 북의 사적지 해설강사의 모습이다. 쑥섬은 50년 전인 1948년 4월 김구·김규식 선생이 남북협상 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하루 휴식했던 곳으로 당시 사용했던 배와 오두막 등의 유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날 해설강사는 유난히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등 남쪽의 원로 역사학자들이 대거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전문가답게 유적 하나하나를 낭랑한 목소리로 빠짐없이 소개한다.
“자주 오십시오”라고 마지막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는 평양의 미소가 담겨 있었다.
북을 방문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곳저곳을 참관(방문)하게 된다.

방문지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만경대고향집, 주체사상탑, 개선문, 모란봉 을밀대 등 평양의 명소와 유적지들이 두루 망라된다.




전문교육을 통해 체계적으로 육성

남쪽의 방문단체나 방문객들이 오기 전 북측의 초청기관에서는 방문자의 요구를 일정하게 수용해 방문기간 참관할 곳과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도면밀하게 짜놓는다. 이런 일을 북에서는 ‘조직사업’이라고 한다. 따라서 참관지에 도착하면 사전에 연락을 받은 해설강사, 관리인들이 나와 빈틈없이 안내한다.

남쪽에서 간 방문객들은 가끔 “이런 곳이 유명하다는데 방문하고 싶다”는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북측의 안내원들은 가장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사전에 ‘조직사업’이 안 된 곳은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북측의 한 안내원은 “한번은 남쪽에서 온 분들이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해 학생들의 예술공연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소년궁전에 연락해 봤더니 방학 중이라 공연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설명해도 ‘일부러 보여주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 때는 할말이 없더라”고 말했다. 남과 북의 ‘다름’을 보여주는 한 사례인지도 모르겠다.




평양 개선문 해설강사 홍현희(24) 씨.[사진/유수]

북을 방문하면 어느 곳에서나 관광지와 유적지를 안내, 해설해주는 해설강사들을 만나게 된다. 해설강사는 남쪽식으로 표현하자면 ‘관광안내원’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북측에서 해설강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쪽에서 대학을 나온 전문 관광안내원들이 늘어나듯이 북쪽에서도 해설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해설강사들은 사적지와 유적지를 방문하는 북 주민들과 외부 참관객들에게 꼼꼼히 관련 역사적 사실과 내용을 설명해 준다. 그 만큼 이들의 사회적 대우도 매우 높은 편이다. 생활비와 승진은 직능과 급수에 따라 달라진다. 보통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배치되면 5급이고, 1급까지 급수가 올라간다.

보통 김일성종합대학의 역사학부 사적학과나 철학부 졸업생, 사범대학의 역사학부 졸업생 등이 배치된다.

해설강사가 활동하는 분야도 다양하다. 통상 외부의 방문객들은 주로 사적지에 근무하는 해설강사들만을 만날 수 있지만 북 내부의 직업총동맹·여성동맹·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등 각 기관별, 직능별 조직에도 많은 해설강사들이 근무하고 있다. 남쪽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만수대의사당에도 해설강사가 있다. 이곳의 해설강사 리연주 씨는 각 국의 고위인사들을 상대로 의사당의 설립연도 등 건물 내력을 설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단체에 소속된 해설강사들은 2~3년에 한 번씩 평양서 각 단체별로 모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각 지에서 모인 해설강사들이 경험발표회도 갖는다. 한 해 동안 농민이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사상교육과 당정책 선전을 펼친 교육 경험과 성과를 결산하는 모임이다.

조직에 소속된 해설강사들은 주로 조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상교양사업이 최우선 임무다. 한마디로 조선로동당의 정책이나 국가적 사업내용을 대중이 알기 쉽게 강의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 하면 조직원들이 지루하고 짜증나지 않게 구수한 말솜씨로 강의를 할 것인가를 항상 고민한다. 북 당국은 해설강사들에게 “격식과 틀이 없이 구수한 말솜씨로 간편하고 알기 쉽게 강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강의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격식과 틀이 없이 구수한 말솜씨로 쉽게 강의



묘향산 보현사 해설강사.[사진/유수]

이런 점에서 묘향산 보현사의 ‘아줌마 해설강사’(아쉽게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북의 ‘모범강사’라 할만했다. 그는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절의 내력과 서산대사와 관련된 일화 등을 구수한 입담으로 방문객들의 박수를 유도해 냈다.

만경대의 한명실 씨도 남쪽 방문객들에게는 낯익은 해설강사다. 2월에 만경대를 방문했을 때는 이곳의 막내 해설강사인 문명희(23) 씨를 비롯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공훈 해설강사 등이 나와 방문객을 맞이했다. 코트를 입고 마이크를 들고 설명하는 한명실 해설강사의 목소리는 근엄한 여선생님의 인상을 준다. “건강해 보이십니다”라며 인사를 건네자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오래 동안 이곳에 근무해서 그런지 악수를 청하며 인사하는 남쪽 손님들이 많았다. 한 씨는 1998년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 소설가 김주영 씨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도 해설을 맡았던 베테랑 해설강사다.

최근 북에서 유명해진 해설강사 부부가 있다. 몇해 전 관광명소로 개발된 평안남도 송암동굴 관리소 해설강사 김명옥 씨 부부다. 이들은 지난해 4월 이곳을 현지지도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결혼상’을 보낸 이후 전국적으로 화제의 인물이 됐다. 김 씨 부부가 결혼상을 받은 이유는 “조국의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인민들이 향유하게 하며 송암동굴을 발굴 정리하는 사업에 자기의 순결한 마음을 다 바쳐 일했기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이 유명인사나 고령자들에게 종종 ‘생일상’을 보내기는 하지만 첫 가정을 이루는 젊은이들에게 결혼상을 선물한 사례는 지난해 3월 21일 ‘마라톤 영웅’ 정성옥 부부에게 준 것이 유일하다. 그만큼 이례적이고 화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남편 김정남 씨는 3년전 제대한 뒤 송암동굴 건설대 부소대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은 동굴개발 사업을 끝내고 김 위원장을 초청해 결혼식을 올리기로 다짐했고 김 씨 부부와 군 건설자들의 노력 속에 송암동굴은 마침내 새로운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김 위원장이 결혼상을 보낸 것이다.

한편, 항상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해설강사들에게는 어려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남쪽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의 해설강사는 다른 강사보다 훨씬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혁명열사릉에는 항일빨치산 131기의 묘가 있는데, 이곳의 해설강사 김영옥 씨는 일일이 이들의 경력과 활동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남보다 훨씬 많은 학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항일빨치산들의 묘가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에 나눠져 있는데, 기준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김 씨는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는 항일열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했던 분들이고, 일반 대원들은 애국열사릉에 안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애국열사릉의 해설강사 백광옥(38)씨는 더 학습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애국열사릉에는 500기가 넘는 인물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에게 대해 일일이 설명하려면 굉장히 힘들겠습니다”라고 하자 활발한 성격의 백 씨는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지만 항상 학습을 하고 경험이 쌓이면 일 없다(괜찮다)”며 “힘들기보다는 이분들의 업적을 인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자부심이 더 크다”라고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남쪽에서 오신 동포들에게 설명할 때가 가장 신명이 납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직무에 자부심이 강한 당찬 여성들



백두산 밀영 귀틀집 앞의 해설강사들.[사진/유수]


근무환경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해설강사들도 있다. 이점에서는 아마도 백두산에 근무하는 해설강사들이 가장 어려움이 클 것 같다. 이들은 불과 두 발짝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와 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악천후 속에서도, 흰눈을 동반한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도 백두산을 찾은 손님을 위해 백두산의 명소들에 대한 안내와 해설을 해주어야 한다.

이곳에 상주하는 리희옥 씨를 비롯한 5명의 해설강사는 보이는 것이라곤 바람과 구름과 안개뿐인 백두산정의 외로운 막사에 상주하면서 백두산을 찾아오는 탐승객들에게 해설을 들려주고 있다.

1998년 이곳을 방문했던 소설가 김주영 씨는 “그녀를 백두산에서 삼지연까지 사뭇 뒤따라 다니며 예민하게 관찰했지만,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황량하고 고적한 근무환경에 대해 회의나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징조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만큼 해설강사들에 대한 국가의 배려도 많고, 이들은 자신의 직무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히 해설강사들은 개성의 왕건릉, 공민왕릉처럼 관리원이 해설원을 겸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여성이다. 예외가 있다면 북이 자랑하는 여성전용 산부인과병원인 평양산원의 안내해설자는 공교롭게도 남성이다.

역사유적지와 명소들에 근무하는 해설강사들을 통해 북의 여성들이 이북 사회의 중심축에 어느 계층보다 완강하게 뿌리박고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그들과 대화를 해 보면 북 여성들의 적극적이고 당찬 성격이 가슴에 와 닿는다.

물론 남쪽 방문객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점도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해설 내용의 다양성 부족이다. 북쪽 주민들의 경우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해설강사들의 설명이 남쪽 사람들에게는 내용과 관심에서 다소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동행했던 한 역사학자는 “유적지 설명에 너무 일방적인 내용이 많아 진지하게 듣기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며 “대상에 맞는 다양한 내용과 설명방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다음에 오실 때는 함께 찍은 사진을 꼭 가지고 오세요”라며 환하게 웃던 한 해설강사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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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고 있을까|협동농장

아영스

2005. 2. 1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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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벌농사·감자혁명으로 식량난 해결 모색”
어떻게 살고 있을까|협동농장





강은지 기자 happy@minjog21.com






개천절 남북공동행사를 맞아 기자가 평양을 찾았던 10월 초, 북녘의 들판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올 여름 북녘은 태풍 매미의 피해는 적었지만 일조량이 시원치 않아 벼이삭이 그렇게 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북녘의 농촌 풍경,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북녘에서 농업활동은 알려진 것처럼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이루진다.

협동농장의 농장원은 보통 500∼600명 정도인데 많은 곳은 1000명에 이르기도 하며 리(마을) 하나가 하나의 협동농장을 구성하기도 한다.

협동농장과 조금 다른 것으로 국영농장도 있다.

리협동농장이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 소속이라면 국영농장은 도농촌경리위원회가 관리하며 도 전체의 농업에 관련된 일을 맡는다. 1개 농장은 5∼8개의 마을로 나뉘어져 그 마을을 중심으로 작업반이 구성되어 있고 각 작업반은 다시 7∼8개의 분조로 나뉜다.

이 1개의 분조가 농사짓는 땅 넓이는 보통 10정보(1정보는 3000평)가 넘기 때문에 1개 작업반은 분조의 수에 따라 대개 50정보에서 많게는 100정보를 맡아서 농사를 짓는다.

이렇게 협동농장이 리와 같은 하나의 행정단위를 이루기 때문에 각각의 협동농장 내에는 리분주소, 출판물보급소, 리진료소, 이발소, 미용실, 수리점과 같은 편의봉사실, 기계화작업반, 보수반, 철공소, 상점 등이 갖춰져 있다.

협동농장 내에 있는 기계화작업반은 그 인원이 20명 정도로 농지 정리를 할 수 있는 기계를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철공반에서는 농기계를 자체 생산하고 보수반에서는 협동농장 내 인민들의 집을 짓기도 하고 기계도 수리하고 둑 보수 작업도 알아서 한다.

이처럼 하나의 협동농장은 인민들의 필요를 대부분 자체 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자체적으로 하나의 행정단위 이루는 협동농장




올 2월 개성 근교 농촌의 풍경.
[유수 기자]

한 마을 단위, 약 100명으로 구성되는 작업반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계화작업반, 철공반, 보수반, 돼지, 양, 염소 등을 키우는 축산반, 채소를 기르는 남새반 등도 있지만 주로는 벼, 강냉이, 감자 농사를 짓는 농산반을 가리킨다.



각의 작업반에는 반장, 기술원, 통계원이 있다. 반장은 그 작업반의 생산을 담당하고 통계원은 생산량이나 개인의 로동량만이 아니라 생활도 공수(점수)를 매겨 통계를 낸다.

다시 말해 1개 농장의 총 생산 책임자는 리관리위원장과 기사장이며 농장의 생산담당 대표인 리관리위원장 밑으로 관리부위원장, 작업반장, 분조장의 순서로 이어지고 관리부위원장과 같은 급인 기사장은 그 밑의 기술원들과 함께 농장의 기술을 총지도하는 것이다.

농장원의 하루생활은 일반 로동자의 생활과 거의 비슷하다. 보통 분조별로 작업반 선전실에 모여서 작업지령을 받고 조회를 한 후에 일을 시작하는데 한 여름 새벽부터 김매기를 할 때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절차 없이 바로 작업터로 가서 일을 한다.

전 농장원이 쉬는 농민의 날은 3월 5일, 그리고 로동자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데 반해 농민들은 10일 간격으로 1일, 11일, 21일에 쉬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농민시장도 농민들이 쉬는 날인 매 1일에 열렸다.

한편 농민들의 조직으로는 농업근로자동맹(농근맹)이 있다. 1964년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열린 조선로동당 제4기 8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가 발표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같은 해 6월 조선로동당 제4기 9차 전원회의에서 농업근로자동맹을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각 군 단위로 농근맹 조직위원회를 편성해 모든 협동농장원은 물론, 농장과 관련있는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입하게 했다. 이에 따라 농근맹에는 협동농장, 국영농장, 국영목장, 군 협동농장 경영위원회, 관개관리소, 농기계제작소, 농기구공장, 자재공급소, 가축위생방역소 등의 노동자, 사무원까지 가입되어 있다.

1965년 3월 25일 평양대극장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한 농근맹은 조선로동당의 외곽단체로서 당의 노선과 정책을 수행하고 당과 농업부문의 노동자, 사무원을 연결시키는 인전대 역할을 한다.

맹원수는 창설 당시 230만 명에 이르렀고 지난 1979년에는 약 30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된 바 있으나 1993년 11월 현재 맹원수는 약 130만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초 북은 식량문제 해결을 국가적 과제로 삼고 이의 실현을 위해 농업부문 선진기술 도입, 토지정리, 두벌농사, 종자혁명과 감자농사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북은 해당 지역의 과거 품종배치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각 지방의 토양성분과 기후조건에 가장 알맞으면서도 수확고가 높은 여러 가지 품종들을 적절히 배합하는 적지적작(適地適作), 적기적작(適期適作)의 원칙에 따라 품종을 선택하도록 지도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 지도사업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현지학습반이다. 현지학습반은 현장에서 로동자를 대상으로 실무교육을 담당하는 북의 독특한 교육형태다.

대표적인 예가 1973년부터 30년간 황해남·북도, 평안남·북도, 평양, 함경남도, 개성 등지에 116개의 현지학습반을 운영해온 계응상사리원농업대학으로 이 대학은 올해에만도 22개의 현지학습반을 조직하고 630여 명의 농업근로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정보농업으로 생산량 늘려




담배를 수확하고 있는 농민들.

이와 함께 농업기계화연구소와 평양농업대학 등에서는 물거름 주는 기계, 무 뽑는 기계, 보습, 써레, 씨뿌림 장치가 장착돼 있어 써레질과 씨뿌리기 등을 단번에 진행할 수 있어 두벌농사에 적합한 농기계인 종합토양관리기계 등 창의적이고 실리적인 새 농기계를 개발 보급하는데 힘쓰고 있다.



지난 2000년 말부터 농업과학원의 지원을 받아 량강도의 대홍단군, 백암군, 삼지연군 등에 무바이러스 씨감자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감자조직배양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는 등 감자농사 확대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특히 백암군에는 올해 들어서만 60여 종 5000여 점의 트랙터 부속품과 40여 종 4만여 점의 각종 영농자재가 전달되는 등 백암군 감자농사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또 북녘에서는 추위에 강하고 생육기일이 짧으면서도 소출이 비교적 높은 밀, 보리의 특성을 이용해 매년 봄과 가을에 두벌농사(이모작 영농)를 하고 있으며 두벌농사 면적을 더욱 확대해 곡물증산에 힘을 쏟고 있다.

북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올해 초 “당의 두벌농사 방침은 우리나라에서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완전히 풀 수 있게 하는 가장 정당한 방침”이라며 “두벌농사를 하는 것은 새 땅을 얻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북녘의 대표적인 평양지대인 황해남도 연백평야에서는 지난해 가을에 3000 정보의 밀, 보리 농사를 지은 데 이어 올 봄에도 최고 수준의 면적에 밀과 보리를 심어 많은 수확을 냈다고 한다.

한편 북은 2007년까지 식량 생산량을 800만 t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농업구조 개선작업에 착수했다. 북은 시범적으로 안악, 은천, 재령, 신천군 등 황해남도 4개 군에 컴퓨터를 이용해 모내기를 하는 등 정보농업을 도입했다.

북이 말하는 정보농업의 대책은 작물배치 개선, 품종배치 개선, 영농공정 개선, 토양에 맞는 두벌농사, 화학비료의 효율적 이용, 지력 제고, 농촌 과학기술보급체계 확립, 생산계획 수정 통한 농민 노동의욕 제고 등 8가지다.

이를 위해 농업과학원 컴퓨터 분야를 비롯한 대학, 연구기관 과학자들과 생태환경보호부문, 산림부문, 국토계획부문의 전문가 30여 명이 집결해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북은 쌀과 옥수수 위주의 영농에서 벗어나 감자, 고구마, 콩 등 생산성 높은 작물의 경작을 적극 권장, 재배작물의 다양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토질, 기후 등 영농 요인에 대한 분석작업을 시작했다.

이 ‘정보농업’을 위해 북은 벌써 지력과 기후조건을 입력하면 볍씨의 파종날짜와 모내는 시기를 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기르기 프로그램 ‘봄노을’과 언제 얼마나 수확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농작물생육 예보프로그램 ‘포전길’을 개발했다.

각 지방별로 특수식물 재배단지를 조성해 그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을 생산하는 것도 북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농업 정책의 하나다.

황주군 초물 단지, 통천군 조피나무 단지, 옹진군 귤나무 단지, 사리원 포도나무 단지, 김형권군 사과나무 단지, 백두산 일대의 들쭉나무 단지 등 북 전역에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비교적 규모가 큰 특수식물 재배단지가 약 10여 곳에 조성돼 있다.

가을과 겨울철 시민들에게 군고구마를 판매하기 위해 평양시 강남, 강동, 상원군과 사동, 력포구역 등의 협동농장에서 고구마 경작을 크게 늘리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다.


토지정리, 관개수로 개설로 농업 활성화

이와 함께 최근 북은 전역에서 토지정리와 새 농촌마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1998년 9월 강원도를 시작으로 1999년 평안북도, 2000년 황해남도에서 각각 토지정리 사업을 완료했으며 지난해 3월부터는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 토지정리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평양시, 남포시, 평안남도에서 정리할 토지는 총 9만 정보에 이른다. 이미 황해남도는 2000년 10월부터 1, 2단계에 걸쳐 작은 규모의 논과 밭을 대규모로 규격화하는 토지정리사업을 전개해 1년 6개월만에 모두 10만 정보의 농경지를 새로 조성했으며 55∼60가구의 주택이 들어선 130여 개의 새 농촌마을을 세웠다.




최근 농촌에 새로 지어진 문화주택들.

북은 농경지를 정리하면서 논, 밭이나 도로 주변의 낡은 집들을 없애고 산기슭에 농촌주택을 건설하고 있다. 지난해 농촌지역에 새로 건설, 공급된 주택만 해도 11만 3600여 채라고 한다.



이 같은 조치는 농촌 주택단지의 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농경지 곳곳에 있는 주택을 없앰으로써 토지정리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경지면적을 확충하려는 정책에 따른 것이다.

토지정리 사업이 완료되면 새 농지에 대한 땅심높이기 작업에들어간다. 이 작업은 농업과학원 토양학연구소에서 맡고 있다. 연구소는 토지정리를 마친 각 지역의 토양을 채취해 질소, 인, 칼륨 등의 함량을 분석하고 이를 컴퓨터 데이터베이스화해 이 자료를 토대로 비료 양과 물대기 등을 조절하고 있다.

토지정리 사업과 함께 다양한 인공수로 건설 및 관개시설 개선도 농업 활성화를 위해 북에서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지난 4월에는 평안남도 개천시 대각리에서 순천시 등을 거쳐 남포시 강서구역의 태성호를 잇는 총 연장 150여 km의 자연흐름식 물길인 개천-태성호 인공수로를 개통했다. 이로 인해 서해 곡창 10만 정보의 논밭에 풍부한 농업용수가 제공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1월에는 황해남도 강령간석지 제방저수공사가 완공돼 관개용수로 이용할 수 없었던 저수지의 물을 강령-옹진 지구의 1만 1000여 정보의 논밭에 원만하게 대줄 수 있게 됐으며 동시에 1000여 정보의 새로운 땅을 확보했다.

또 평안북도 관개용수 확보를 위한 백마-철길 물길도 건설 중인데 이 물길이 완공되면 수만㎾h의 전력과 많은 양수설비를 쓰지 않고도 평안북도 내 4만6000여 정보의 농경지에 물을 충분히 댈 수 있어 농업생산을 더욱 늘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7·1경제조치 이후 높아진 농업 생산량

북에서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 체제로의 과도기에 발생하는 사회주의적 소유의 한 형태, 다시 말해 사적 소유로부터 전인민적 소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완전한 소유형태를 ‘협동적 소유’로 보고 있다. 이 협동적 소유의 대표적인 분야가 농업이며 협동농장이 그 전형적인 모델이다.

이렇게 협동농장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지난해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가 시행된 이후 각 협동농장에서도 생산량과 결산분배 등에서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기존에 쌀 1kg을 80전에 수매, 8전에 판매하던 것을 7·1경제조치 이후 40원에 수매해 44원에 판매하는 등 쌀 수매가격을 대폭 높여 농민들에게 많은 분배몫이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농장원들의 노력과 열의가 높아진 점이다.

이에 따라 협동농장 생산실적과 분배량이 크게 늘어났다. 생활비 및 가격의 조정이 이뤄지고 일한 만큼 분배받게 되자 가족 단위로 30만원 이상의 돈을 받는 농장원들도 나오게 됐다고 한다.




2001년 10월 금강산 농민대회에 참가한 북쪽 농민이 태평소를 불고 있다.
[유수 기자]

부업 차원에서 한때 유행했던 텃밭 경작도 줄어들었다. 과거 15명 내외이던 농업생산의 최소단위인 분조 규모도 7∼8명 단위로 축소되고 가족단위 분조를 도입했으며 생산물의 70%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지역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올해 북의 2003년도 양곡회계연도(2002.11∼2003.10) 식량수요량은 632만 t(남측 통일부 추산)에 이르고 있으나 확보가능한 식량은 489만 t에 불과해 143만 t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하지만 북은 다양한 농사기술 혁신과 농업구조개선 노력으로 식량난 해결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 아래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2003년 11월호]

북녘 경제 어떻게 돌아가나|시장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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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경제 어떻게 돌아가나|시장

아영스

2005. 2. 1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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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생활경제 활력소 ‘시장’ 국가가 띄운다
북녘 경제 어떻게 돌아가나|시장





민족21 minjog21@minjog21.com






사회주의 북녘 사회의 경제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 계획경제라는 전체 틀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주민들의 경제생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2년 7월에 시행된 7·1 사회주의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녘 사회에서 화두로 등장한 ‘시장’에서 출발해 북녘 사람들의 장바구니 경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정창현 | 국민대 교양과정부 겸임교수


2003년 10월 초 평양 고려호텔에서 중구역(평양의 ‘구역’은 남쪽의 행정구역상 ‘구’에 해당)에 사는 30대 중반의 여성 봉사원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시장에는 자주 갑니까?


“중구역에는 시장이 없어 주로 인접한 평천구역 해운동에 있는 시장에 갑니다.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갑니다. 쌀, 부식물 등은 국가의 배급체계를 통해 사서 먹기 때문에 국영상점에 딸리는(부족한) 야채, 잡곡류, 신발 등을 주로 시장에서 구입합니다.”


통일거리에 현대적인 시장건물이 들어섰다는데 가 보았나요?


“통일거리 시장은 한달 전쯤 문을 열었습니다. 시설이 잘 돼 있고, 근처에서 온 주민들로 붐볐습니다. 판매원들은 주로 가정주부나 나이 드신 분이 많습니다.”


시장의 물품가격도 국가가 정합니까?


“물건가격은 품목별로 국가가 정한 기본가격이 있고, 품질에 따라 ‘합의가격’이 정해집니다. 물건값을 깎기 위해 흥정도 합니다. 시장경제를 한지가 얼마 안돼 아직도 익숙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민들이 ‘시장경제’란 말을 씁니까?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시장경제 아닙니까. 아직도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데 익숙하지는 않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7·1조치 이후 시장이 많이 달라졌습니까?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생활이 편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생활비가 농민시장의 물가를 따라가지 못했지만, 이제는 생활비가 많이 오르고 시장에서 다양한 물품을 살수 있게 돼 편리합니다.”


한달에 생활비로 얼마나 받으세요?


“세대주(남편)와 내 생활비(임금)를 합치면 8000원 정도입니다. 달마다 차이가 있지만 쌀 판매소에서 쌀을 구입하는데 월 1500원, 시장에서 부식물 구입하는데 월 2000원 정도, 기타 지출이 3500원 정도입니다. 알뜰하게 쓰면 매달 1000원 내외를 저금할 수도 있습니다.”



해방 이후부터 시장은 있었다


이 가정주부는 ‘성과급’을 많이 받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일반 근로자들보다 생활비를 많이 받고 있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평양에서 만나는 다른 봉사원들보다 거리낌없이 시장에 대해 이야기해 오히려 내가 놀랐다.

다른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시장에 가 봤냐고 물어봤다.

“평천구역 시장에 가서 화장품을 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보통 시장에 가시기 때문에 갈 기회가 별로 없고 물건값도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어쩌면 평양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일상적 답변일 지 모른다.
살림을 직접 챙기는 가정주부가 아니면 아파트와 전기사용료를 얼마나 내는지, 시장의 물건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아직은 과거의 배급체계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시장의 등장은 주민들의 생활을 점차 바꾸고 있다.

2002년에 만났을 때 “농민시장에 가 봤습니까”라고 묻자 “남자가 시장엔 왜 가냐”고 이상한 표정을 짓던 북의 한 안내원은 2003년 9월에 다시 만났을 때는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곤 한다”라고 말했다.

시장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라 평양 시민들의 ‘자랑’이 되고 있다.
2003년 11월 6일 평양서 열린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최영건 북측 위원장(내각 건설건재공업성 부상)은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장마당(농민시장)을 시장으로 고쳤다”라고 말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품목에 대해서도 “장마당에서는 농·토산물이 나왔으나 시장에는 개, 닭, 남새(야채), 무 등 농·토산물 뿐 아니라 최근에는 공업제품도 나온다”라며 “시장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다”라고 밝혔다.

사실 북에서 ‘시장’이 낯설 이유는 없다. 해방 이후 ‘인민시장’ ‘농촌시장’이라 불리던 시장이 있었고, 국유화가 완성된 이후에는 ‘농민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시장’이란 이름의 시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북에서 사회주의가 완성된 1958년이다.
1958년 8월 발표된 내각 결정 140호에는 농민시장에 대해 “협동농장들의 공동경리와 협동농민들의 개인부업경리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축산물의 일부를 농민들이 일정한 장소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직접 파는 상업의 한 형태”로 규정돼 있다.

당시 농민시장은 판매자인 농민들과 구매자인 도시주민들의 생활상 편의를 고려해 원칙적으로 군소재지인 읍과 노동자구, 큰 도시들의 구역 단위에 각각 하나씩 두어 10일장 형태로 운영됐다.

북 당국은 주민들이 농민시장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시장 안에 농민들이 내다 파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매대(판매대)들과 농산물, 육류, 가금, 수공업제품과 농토산물의 판매장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북 당국은 농민시장에서 농토산물을 위주로 판매하게 하고 공업상품은 반드시 국영상업망을 통해 계획적으로 공급하도록 제한했다.

농민시장이 국영 및 협동단체 상업의 보충적 통로로서 역할을 넘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래 상품의 범위를 일정하게 제한한 것이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협동농장에서 분배받은 것들 중 소비하고 남은 여유 농산물과 개인 텃밭경리를 통해 얻은 농산물을 농민시장에서 판매했다. 이때 거래 농산물 중 식량은 제외됐다.



사회주의계획경제와 시장의 공존


특히 북 당국은 농민시장의 불법적인 거래를 막기 위해 농민시장을 관할하는 해당 지역 행정 및 경제지도위원회의 상업과에서 농민시장의 이용절차를 주민들에게 교양하고, 이를 위반했을 때의 법적 조치를 마련했다.

북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농업협동화와 산업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국가적 차원의 공급제가 전면 실시된 1950년대 후반∼60년대에 농민시장의 소매상품유통액은 전체 유통액 중에서 1%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농민시장은 국영상업망을 보조하는 대단히 제한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역할이 축소되면서 농민시장을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나왔다. 1960년대 후반 일부 북 경제관료들은 “부업생산이나 농민시장이 공동경리에 나쁜 경향을 주고 리기주의를 길러준다”는 이유로 농민시장을 없애자고 했다.

그러나 1969년 3월 당시 김일성 수상은 “(법령으로 농민시장을 금지하면) 장마당은 없어지지만 암거래는 의연히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중략) 농민시장을 강제로 없애고 해결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히려 인민생활에 불편을 주고 숱한 사람들을 쓸데없이 죄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사회 속에서 농민시장의 역할을 여전히 인정한 것이다.

물론 북의 농민시장은 공식적으로 합법적인 사적 경제활동으로 허용된 것이기는 하나, 완전하게 국가통제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농민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근본인 계획경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고 주민들에게 부수적인 수입을 제공해주는 원천이 되어왔다.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농민시장이 점차 부분적으로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경제활동이 함께 진행됐다는 점이다.

1989년 이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국제무역 시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1990년대 초반 조성된 ‘북핵위기’로 미국의 경제봉쇄조치는 더욱 강화됐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급서하고, 계속된 자연재해까지 겹쳐 북 경제는 급속도로 어려워졌다. 특히 전력 부족으로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국가의 식량배급과 생활필수품의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주민들은 대부분을 국가에 의존하던 공급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시장은 계획경제의 보완적 역할에서 벗어나 주민들이 먹고, 입고, 쓰는 개인 경제생활을 충족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거래가 금지되던 품목들인 쌀이나 옥수수와 같은 곡물들과 전자제품과 같은 공업제품, 의약품, 수입품 등이 공공연하게 유통되기 시작했다.

원래 10일장이던 것도 매일장으로 바뀌었다. 지정된 개장 장소를 벗어나 어느 곳에서나 장이 서고, 너도나도 장에서 장사를 하게 됐다.

농민시장의 기능 확대와 국가의 통제 약화는 ‘사적 부문’의 확대로 이어졌고, 계획경제시스템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농민시장이 국가 당국의 간섭을 덜 받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용인된 사적 활동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불법 활동으로까지 이어지는 부작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북 당국은 2001년에 나온 내부 문건에서 “최근 년간에 국가가 식량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직업마저 버리고 장사나 하면서 자기 개인의 리속을 채우는데로 나갔다”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북 당국은 농민시장의 확대로 나타난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1999년 4월에 ‘인민경제계획법’을 채택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고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천명했다.
인민경제계획법은 계획경제부문의 규율을 확립하고 그 동안 침체되어 있던 계획부문의 경제활동을 정상화·활성화하고 약화된 국가의 사회·경제 통제력을 회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장, 불온한 단어 아니다


또 북은 현실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농민시장의 역할을 폭넓게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의 국가계획위원회 최홍규 국장은 2003년 4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3월 말부터 평양에서도 각 구역마다에 있는 ‘농민시장’을 ‘시장’으로 부르게 됐다”며 “농산물만이 아니라 각종 공업제품도 거래되고 있는 현실에 맞게 이름을 고친 셈”이라고 밝혔다.

농민시장의 종합시장으로의 변화는 최 국장의 지적처럼 “시장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회주의 상품유통의 일환으로 인정”하는 조치였다. 북 당국이 역할이 커진 농민시장의 기능을 인정해 ‘계획과 시장의 공존’으로 나가기로 공식 결정한 셈이다.

농민시장의 변화과정을 추적한 정은미(서울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이러한 변화는 등소평이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계획과 시장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구별이 되지 않으며,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은 있으며,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의 개혁·개방을 정당화시켰던 것을 연상시킨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북은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2003년 11월 6일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남쪽의 경추위 대표단장이 “시장에 경제를 붙여 시장경제로 부르자”라고 즉석에서 제안하자 북쪽의 최영건 위원장은 “그건 안 된다. (이같은 변화는) 시장 사회주의”라고 응수했다.

‘시장’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의미하는 ‘시장 사회주의’란 용어를 북의 고위관료가 공개적으로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특히 최 위원장은 시장 운영에 대해 “국가가 투자해서 평양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물도 다 꾸려놓았다”며 “개인들도 여유 있는 것은 다 내놓는다”라고 말했다. 국가가 ‘시장’을 장려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북녘에서 ‘시장’은 이제 ‘불온한 단어’가 아니며 과거의 ‘농민시장’으로 불릴 때의 시장도 아니다.
2002년 3월 기존의 ‘농민시장’이라는 명칭을 ‘종합시장’으로 단순히 이름을 바꾼 것과 다른 차원의 변화다. ‘3월조치’가 원래 불법인 ‘공업제품의 농민시장 유통’을 합법화한 조치였다면, 통일거리에 현대적 시설의 시장을 국가가 투자해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국가차원의 시장 확대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 1998년 개정된 헌법에서 ‘합법적 경리활동을 통해 얻은 수입’은 개인소유로 인정했기 때문에 주민의 개인소득이 이전보다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통일거리에 새로 만들어진 ‘통일시장’을 다녀온 인사들에 따르면, 북녘의 시장에서도 남쪽의 재래식 시장처럼 물건값을 놓고 흥정이 이루어지고, 품질과 수요 공급에 따라 시장마다 다른 판매가격이 정해진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한 안내원은 “국영상점망을 통한 물자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장 판매 상품은 국정가격보다 비싼 편”이라며 “시장에 나와 물건을 파는 개인이나 기관들은 판매액에 따라 일정량의 매대사용료를 시장관리위원회에 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개인들이 시장에서 큰 규모로 가게를 운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 안내원은 “개인이 시장에 내놓는 물건들은 협동농장이나 기관에서 내놓는 것보다 가격과 품질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 아직은 시장을 시범운영하는 단계임을 알 수 있다.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임대형식으로 개인상점을 내거나 몇 사람이 동업해 내는 ‘합의제 상점’을 허가하는 조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바야흐로 새로운 형식의 ‘시장’이 북녘 경제의 활력소로, 주민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근원지로 등장하고 있다. 2004년에는 평양의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2004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