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September 20, 2018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 네이버 블로그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아영스

2005. 2. 17. 15:10


"나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백만장자였다"
연속기획 <본지 단독 방북취재> ㅣ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






김지형 기자 cankjh@minjog21.com






;사회주의 사회에도 부자가 있다? 일제시기부터 대부호로 불리던 송대관, 그가 현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의 부친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업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가 들려주는 ‘나의 아버지 송대관’ 이야기. 그는 왜 ‘사회주의 백만장자’라고 불리는 것일까.



평양안경상점 송성희 지배인을 만나기 위해 숙소인 보통강호텔 1층 로비로 내려갔다.


1층에 있는 은방울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바쁜 송성희 지배인을 기자 일행의 숙소에서 만나게 된 것은 사정이 있었다.

북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4월 15일, 김 주석 탄생일)’을 앞두고 당시 평양 거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평양안경상점이 들어선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안경상점 지배인을 인터뷰하려면 당연히 상점으로 가는 게 도리건만, 송 지배인 측에서 극구 사양을 했다. 이유는 ‘보수 공사 중이기 때문에 좀 어지럽기’ 때문이라는 것.

북측 사람들의 정서가 그렇다.

손님에게 기왕이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될텐데 하는 아쉬움도 컸지만 북녘 동포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했다.

송 지배인은 대신 개보수 단장이 끝나면 그때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안경 팔 생각이 없다?

그렇게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송성희 지배인. 가만 보니 그녀도 안경을 끼고 있었다.

지배인 선생께서도 안경을 썼는데 눈이 나쁘십니까.


약간. 보호하기 위해서 씁니다. 0.25쯤 됩니다.”
기자 일행은 모두 안경잽이다. 그래서인지 안경상점 지배인과의 인터뷰에 다들 흥미로운 눈치다.

남쪽에서 온 우리들은 다 안경을 썼는데, 평양 시민들의 눈도 점차 나빠지고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남자는 마흔일곱살, 여자는 마흔네살부터 로치가 옵니다. 그때부터 2∼3년 어간에 0.75씩 올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점차 눈을 보호하기 위해 쓰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노화 치료가 목적인가요?
“예방이 목적입니다. 우리는 상점에 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현장에 찾아가서도 봉사해줍니다. 과학자들, 대학 교원들을 비롯해서 공장 기업소에도 찾아가 고급 기능공들의 시력도 검토하고 안경 주문을 받아서 해줍니다. 선반, 용접공등과 도로 관리원들, 오물 관리원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봉사를 해주고 있습니다.”

예방이 목적이라는 안경상점 지배인. 안경상점 지배인이 어떻게든 안경을 팔 생각은 안하고 예방 운운하다니. 안경을 안파는 쪽으로 유도해서야 장사가 제대로 될까?

“그게 다른 나라와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철학이 있습니다.”

참고로 송성희 안경상점 지배인이 알려주는 눈 좋아지는 비결 하나.
눈이 침침하고 피로할 때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별 하나, 나 하나’를 세기 시작해서 백까지 세면 눈이 좋아진다는 것.

북측의 안경 역사는 1956∼1957년경이다. 그러나 안경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인데 바로 송 지배인의 부친이 안경산업을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바로 북녘사회에서 ‘사회주의 백만장자’로 불리는 기업인 송대관(1912∼1994)이다.
1959년 김 주석으로부터 ‘인민들이 안경을 많이 요구하고 있으니 안경을 만들라’는 과업을 받고 당시 관장하고 있던 평양공업품생산협동조합을 1961년 광학유리생산협동조합으로 개칭하면서 안경알과 각종 렌즈, 유리제품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한해 100만 개의 안경 생산을 달성하기도 했다는 것.

김 주석은 송대관 씨가 생산한 안경을 각별히 칭찬했다고 한다. 그가 1984년 유럽지역을 방문할 때 쓴 안경이 바로 송대관 씨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꾼들이 유럽 여러나라에서 생산한 안경을 권했는데 김 주석은 ‘송 동무가 만든 안경을 쓰고 가야겠다’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뒤를 이은 송성희 지배인.
그녀가 들려준 아버지 이야기는 안경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북의 경제사라고 해야할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일제시기부터 북녘 땅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알려진 송대관은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탁발승의 아들이었다. 탁발승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도 회덕군, 그런 그가 떠돌다가 정착하게 된 곳이 지금의 평남 숙천군 부근이었다.

샘터의 한 여인에게 물을 얻어마시다가 넋이 빼앗겨 스님의 계율을 어기고 여인을 보쌈해다가 함께 살았다. 그렇게 해서 낳은 자식이 바로 송대관이다.

소학교 과정을 마치고 영변의 숭덕중학교를 다니다가 중퇴, 사과나무 40그루를 가지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서운 절약가였던 그는 도매업을 하면서 기반을 닦아 나갔다.

1935년 김태복과 결혼했는데 부인의 아버지는 당시 목사 신분이었다. 말하자면 승려의 아들과 목사의 딸이 결혼한 셈이다.

부부는 기업활동을 위해 평양으로 옮겨 정미업을 시작했고, 이어 메이야스업과 도매업에 치중해 많은 돈을 벌었다.

태평양전쟁이 절정에 이르면서 기업활동이 피폐해질 때쯤, 8·15광복이 찾아왔다.

공산당이 온갖 자본을 청산하고 네 것, 내 것이 없이 공유한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더니 자산가들을 위협, 공강하고 오라를 지어 끌어가기 시작했다. 송대관 씨도 무사할 리 없었다.

삼천리표 연필공장

그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가서 기업활동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두 척의 기계배를 세 내어 시멘트와 황금태(물엿) 등을 가득 싣고 떠났다. 감추어 두었던 금덩어리도 실었다. 인천항에 도착한 그는 짐들을 서울로 날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38선 남쪽을 점령하고 있던 미 군정청에서 그가 적산물자(점령지 재산)를 빼돌렸다고 체포령을 내린 것이다.

북에서 도망쳐 온 그는 남쪽에서도 도망자 신세가 되자 절망에 빠졌다.

결국 그는 다시 북행길에 올랐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다.

당시 부친의 심정을 딸인 송성희 지배인은 이렇게 전한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님의 조국개선 방송연설을 우연히 들으신 거예요.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해야 한다는 호소를 들었던 겁니다. 특히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이바지해야 한다는 연설이 아버지의 가슴을 울렸다고 합니다.”

북으로 돌아간 그는 그 후 연필 공장을 지었다. 그가 연필 공장을 세운 건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딸의 표현대로 “돈을 떠난 기업가(아버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당시 이북 사회의 요구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갔다. 해방 직후 문맹퇴치라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필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 주석이 직접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일성 위원장은 그 직후인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첫 번째 의정으로 연필문제를 상정했다.

보통강 기슭에 세운 평양연필공장은 그렇게 생산량이 늘어나고 돈도 쌓여갔다. 그때 생산한 연필이 ‘삼천리표’ 연필이었다.

그후 송대관은 공장을 나라에 넘겨주었다. 목재와 흑연 등 주원료를 강계지역에서 수송해 와야 했으므로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현지에 넘긴 것이다. 대신 초자업(유리기구 생산업)과 고무업에 달라붙었다.

당시 유리제품과 신발 등이 크게 부족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돈 소나기가 쏟아졌다. 돈이 돈을 낳고 새끼를 쳐서 ‘돈 낟가리’에 올라설 정도였다는 것.
그때 갑자기 전쟁이 터졌다.

이때부터 송대관은 그동안 번 돈을 나라를 위해 쓰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그의 딸 송 지배인의 말이다.
“그때 김일성 원수님을 접견한 아버지가 그랬다고 합니다. ‘나라를 잃고서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으면 뭐합니까’라고. 수시로 식량을 사들여 공장 노동자들과 전재민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전쟁 시기 아버지가 나라에 헌납한 돈은 당시 금액으로 515만 원이었습니다.”그로 인해 송대관은 ‘애국적 상공인’으로 칭송되기 시작했다.

전후 복구 시기, 기업인으로서의 그의 자질은 또 한번 드러났다.

당시는 기계설비들이 없어서 쩔쩔매던 때였다. 그는 전후 복구로 북쪽 사회가 땀을 흘리던 시기, 어이없게도 대동강에서 수영과 잠수를 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원산 앞바다에 적들의 배가 여러 척 침몰돼 있다는 얘길 듣고 그 배들에서 요긴한 기계 설비들을 찾아내기 위해 수영을 연습했습니다. 마침내 꼭 필요한 발동기를 찾아내 건져 올렸습니다.”공장은 재빨리 복구되기 시작했고, 금방 종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의사 버리고 아버지의 뒤를 잇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개인 기업가였다.

그러나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채택된 ‘자본주의적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방침’ 이후 그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지닌 전재산 500만 원을 전부 헌납하고 평양공업품생산협동조합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유리 관련 물품을 생산하기 시작해 안경 제조에 나섰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이후 그는 주체사상탑의 봉화 유리 생산을 맡는 등 평양 건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했다.

그가 74세 되던 해, 어느날 ‘자신의 일을 이어갈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습을 본 딸 송성희 씨는 충격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조선혁명박물관 진료소 의사였다. 그의 오빠들도 모두 의사였다. 그녀의 회고다.

“어떻게든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작정 모란편의조합에서 안경 수리공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동안 봉사를 하다보니 개선안경수리소라는 소박한 상점을 내올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장군님의 배려로 평양안경상점을 내올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6개에 달하는 평양안경상점을 총괄하는 지배인으로 성장했다. 모란봉 기슭 안상택거리에 2층 짜리 번듯한 건물에 안경상점을 차리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쁘실까요.”

그의 부친 송대관 선생은 지난 1994년 1월 11일 영면했다.

김일성 주석은 당시 고인에게 자신의 명의로 조화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었다. 애국렬사릉을 통틀어서 애국적 기업인의 자격으로 그곳에 묻힌 사람은 송대관 선생이 유일하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송대관 선생의 묘. 기업인의 묘는 송 선생이 유일하다.


‘사회주의 백만장자’ 송대관 선생의 딸 송성희 지배인은 현재 평양안경상점을 발판으로 해서 본격적인 대외 무역업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부터 ‘고려심청회사’를 설립, 안경도 팔고 의복류, 식료품, 식당 등과 여성 미용품 생산 및 수출입에 나섰다. 그녀의 꿈은 ‘나라를 위한 조선의 심청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2004년 7월호]






2004년 07월 01일 (40호)

[곽병찬의 향원익청] 왜 사느냐고 물으려거든…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곽병찬의 향원익청] 왜 사느냐고 물으려거든…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등록 :2017-07-18 18:13수정 :2017-07-18 19:13

전주교구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지정환’이란 한국 이름을 얻었고,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부안은 평야지대였지만,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간척 공사에 뛰어들었다.

“어떤 나무건 척박한 땅에선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다. 물과 거름이 있어야 뿌리도 내리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 “…” 때론 슬펐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부안에서도 그랬고, 임실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고통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되었다.


“제가 상을 받았습니다.” “누구 덕인지 아느냐?”

2002년 호암상(사회봉사 부문) 시상식에서 지정환 신부는 수상 소감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시작했다.

“40여년간 죽을 고생을 한 제게 주는 상 아니겠습니까?” 
“왜 그리 어리석으냐.” 
“제가 겪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잊으셨습니까?” 
“그러면 네가 그동안 범한 숱한 시행착오와 실수들을 잊었느냐.” 
“(부안에서) 간척 사업을 할 때 둑을 쌓기 위해 피땀 흘렸던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

벨기에 출신의 디디에 세스테벤스는 예비 신학생 시절 극장 뉴스를 통해 한국전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는 독립한 지 얼마 안 돼 또다시 큰 비극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한 건 그때였다. 1958년 서품을 받고 한국으로 떠나려 할 때 부모님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언제 전쟁이 재연할지 모르는데….’ ‘그러니 할 일이 더 많지 않을까요?’

전주교구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지정환’이란 한국 이름을 얻었고,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었다. 부안은 평야지대였지만,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작대기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 짐을 풀자마자 간척 공사에 뛰어들었다. 참가자들에게는 간척지 1정보(3000평)씩 나눠주기로 하고, 기증받은 밀가루를 품삯으로 지급했다. 지게와 손수레로 흙과 돌을 날라 쏟아붓고, 태풍에 쓸려나가면 다시 날라 쏟아붓기를 3년, 그는 100정보의 땅을 확보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던 해부터 설사와 복통이 심했다. ‘음식과 물이 바뀌어서 그러려니…’ 했다. 간척 공사를 할 때는 부족한 재정 때문에 식사 도우미까지 내보냈다. 성당 인근의 중국집에서 하루 두 끼 자장면 등으로 때웠다. 간척이 끝날 때쯤 그의 담낭(쓸개)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담낭을 제거하고 요양차 벨기에로 갔다가 6개월 만에 서둘러 돌아왔다. 농부들과 땅이 궁금했다. 하지만 땅을 받은 농부들은 한 명도 없었다. 땅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고향을 떠난 것이었다. ‘쓸개까지 버려가며 모든 걸 다 쏟았는데….’ 절망스러웠다. “다시는 한국인의 삶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는 몰랐다. 가난은 농부들이 간척지에서 염분이 빠지기까지 4~5년을 기다릴 수 없게 했다.

“그래, 너 혼자서 공장도 세우고, 소젖도 짜고, 치즈도 혼자 만들었느냐. 함께 했던 농민들에게 우유 값을 제대로 지불했느냐,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르느냐….” “그분들께는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

전주교구는 실의에 빠진 그를 ‘별로 할 일 없는’ 임실로 발령 냈다. 임실은 군청 소재지에도 고등학교 하나 없는, 전북에서도 가장 가난한 곳이었다. 노령산맥에 걸터앉은 산악지대여서 땅도 적고 척박했다. 기관장 모임에서 임실 군수는 이런 부탁을 했다. “군민 전체에게 뭔가 하나쯤 꼭 남겨 주십시오.”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조금만 개입하자.” 마침 부안에서 임실로 이주한 신태근씨가 마을 청년들과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내 서랍 속에서 뒹굴면 아무것도 아닌 동전이지만, 모이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1호 조합원이 되어 조합 설립에 앞장섰다.

그러나 일이 없는데 돈이 모이면 뭐 할까? 어느 날 그는 청년들을 산으로 불러 모았다. 키만큼 자란 풀밭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의 보물이 저기에 있습니다.” 소 돼지도 먹지 못하는 풀이 어떻게 보물일까, 청년들은 의아했다. “소 돼지는 먹지 못하지만 산양은 잘 먹습니다. 산양유는 환자들이 먹는 최고급 영양식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시간 부자 아닙니까?” 조합원 12명의 산양협동조합은 그때 탄생했다.

하지만 산양유는 판로가 한정돼 있었다. 약으로나 간주됐으니 일반인은 외면했다. “남는 산양유로 치즈나 만들어볼까?” 그는 1966년 치즈 제조에 착수했다. 조합원에게 줄 산양유 대금은 벨기에 가족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이나 축의금 등으로 때웠다. 그러나 3년 가까이 되도록 치즈는 나오지 않았다. 산양유 대금도 몇 달치씩 밀렸고, 조합원들은 흔들렸다. 1969년 그는 불쑥 유럽으로 떠났다. 제조기술을 배우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공장을 다녔지만 결정적인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애가 탈 무렵 한 귀인이 나타났다. 하느님도 기겁할 골수 공산주의 청년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의 비서라는 그 청년은 제조 비법이 담긴 노트를 통째로 건네줬다.

돌아왔을 때 기다리는 건 빈 공장뿐이었다. 조합엔 신태근씨만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석 달을 넘기지 못한다니….” 그러나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배운 대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정한치즈’(프랑스식 포르살뤼 치즈)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성가치즈’(체더치즈)가 탄생했다.

판로가 문제였다. 1971년 그는 체더치즈 한 덩이를 들고 무작정 조선호텔 독일인 주방장을 찾아갔다. 귀찮아하던 주방장은 한 조각을 먹어보더니 반색을 하며 70킬로 납품을 요청했다. 이듬해엔 서울에 생긴 한국 최초의 피자 가게에 납품할 모차렐라 치즈도 생산했다. 생산과 판로가 안정되자 그는 한 젊은이에게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임실치즈협동조합을 설립하고, 공장과 생산 시설 일체를 조합에 귀속시켰다.

“무지개가족만 해도 그렇다. 욕창은 누가 치료하고, 누가 목욕시켰느냐. 최근에 화장실 청소라도 한 기억이 있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지 신부는 1970년초부터 오른발에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며칠씩 그러다가 사라졌다. 피곤 때문이려니 했다. 1976년엔 한 번 발작하면 걸을 수조차 없었다. 다발성신경경화증이었다. 그해 12월 정밀진단과 치료를 받기 위해 벨기에로 떠났다. ‘불치’ 진단을 받고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박정희 군사독재와 가장 적극적으로 맞선 외국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추방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했다.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체제가 들어섰다. 장애에 더해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다. 1981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벨기에로 돌아갔다. 그러나 2년 만에 돌아왔다. 전주교구는 그에게 장애인 사목을 권했다.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가족이었다. 이리 성모병원에서 시작해 전주의 28평형 전세 아파트로 옮겨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가족이 많아지면서 천주교 사회복지회 건물로 옮겼다. 지금의 ‘무지개가족’이 탄생한 곳이다. 1989년 11월엔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에 지하 35평, 지상 240평 규모의 무지개가족 보금자리가 생겼고, 2년 뒤엔 건평 305평의 제2 무지개가족의 집이 탄생했다.

장애인과 생활할 때 그는 자기 전 물을 과음했다. 소변 때문에 한 번이라도 더 깨어 장애인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대신 하지 않았다. 코라도 만질 수 있으면 귀도 머리도 만질 수 있고, 첫발을 내디딜 수 있을 만큼의 희망만 있으면 장애인들은 그것을 스스로 키워나갈 수 있다! 그는 장애인이 된 것을 감사했다. “그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나무건 척박한 땅에선 뿌리를 내리기란 힘들다. 물과 거름이 있어야 뿌리도 내리고 열매도 맺을 수 있지.” “…”

때론 슬펐고, 때론 화가 나기도 했다. 부안에서도 그랬고, 임실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에게 닥친 고통은 새로운 사역의 기회가 되었다. 농촌 사역, 신협, 장애인 사역 등. 임실치즈가 알려지면서 너도나도 그의 이름과 초상을 거저 사용하려 해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렸다. ‘신부가 돈에 눈이 멀었다’느니 따위의 험담이 쏟아졌다. 논란을 없애기 위해 정식으로 로열티 계약을 맺었고,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 장학재단의 밑돌이 되었다. 자신이 이룬 모든 일에서 손을 뗀 그는 지금 한국천주교 초기 사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물과 거름이 다 있었습니다.”

(*그동안 ‘향원익청’을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년과 함께 연재도 마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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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님
정년이시라니 많이 섭섭합니다.
향원익청 오래도록 잘 읽어왔습니다..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어서 한겨레신문을 스승이라 여기고 거의 30년을 함께한 창간독자 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자주 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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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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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많은 사람이 모르는 역사적사실을 발굴하여 올리시는 대기자님의 박식에, 주1회 나오는 향원익청을 잘 봤는데 정년과 함께 이 난에서 절필이라니 엄청 아쉽습니다,한겨레 창간독자로써 한겨레가 창간에 비하면 많이 붓이 무뎌졌다고 피부로 느끼면서도 그래도 곽대기자님 같은 분이 있어 한겨레가 빛나고, 독자의 힘이란게 미미하지만 밀어 드려야 하겠다 다짐합니다만...한겨레를 떠나시드라도 가능한 글을 올려 주셨으면 합니다.
대기자님 앞날에 영광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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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quire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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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겨레신문 연재 중에서 향원익청을 가장 사랑하는 애독자입니다.
그래서 연재 중단 소식이 너무 섭섭합니다.
그간 좋은 글 읽게 해주신 곽병찬 대기자님께 너무 감사드리며
정년과 상관없이 연재는 계속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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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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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대한 답변은 처음이네요.
감사합니다. 님의 글 읽고 보니, 저도 마음이 쬐끔 흔들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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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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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이메일 주소가 벌써 네이버로 바뀌었네요.
뛰어난 통찰과 문장으로 지금부터 더욱 더 활발하게 독자들에게 좋은 글을 써 주셔야 할 때인데...
너무 슬프고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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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kb****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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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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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oluv1113
약 1년 전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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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시는데 정년이라니... 안됩니다.
향원익청 연재 계속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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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11, 2018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가 본 영화 ‘어느 가족’ : 네이버 뉴스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가 본 영화 ‘어느 가족’ : 네이버 뉴스




[아주 사적인 타인의 리뷰]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가 본 영화 ‘어느 가족’
기사입력 2018-08-19

[신동아]

정의로움, 공정함보다 상식이 앞서는 사회

전남편의 아들에게 생활비를 받아내는 할머니, 자식한테 도둑질을 가르치는 아버지, 자기가 일하는 세탁공장 손님들의 주머니를 터는 어머니, 유사 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는 이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어느 가족’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일탈적이다. 구성원 전체가 법과 사회 질서 바깥에 있는 이 가족의 이야기가 요즘 많은 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5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국내에서 1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다양성 영화로는 이례적 기록이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건국대 교수와 함께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영철 기자]
하지현(51) 건국대 의대 교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영화 전문가다. 2006년 영화 30여 편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분석, 설명한 책 ‘관계의 재구성’을 펴내며 ‘영화 읽어주는 의사’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많은 에세이를 발표한 그는 정신의학계의 ‘파워 라이터’이기도 하다. 하 교수는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다뤄온 주제를 다시 한번 내세운 작품”이라며 “굳이 평가하자면 그의 영화 중 상위 5등 안에 든다”고 평했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베스트’가 아닌가요.

“칸이 좋아할 만한 영화라는 생각은 듭니다.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 작품을 보면 ‘진실과 거짓말, 선과 악 등이 사람 관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끝없이 변주하잖아요. 그게 하나의 작가주의로 평가받고요. 고레에다 감독 또한 ‘피가 같은 사람만 가족인가’라는 이야기를 꽤 오랜 시간 반복해왔습니다. 그 점이 심사위원들에게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또 이 영화에는 인위적이나마 조부모, 부모, 자녀 3대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합니다. 외국인이 생각하기에 동양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가족 구성이죠. 이 영화가 칸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데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내세운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하 교수의 분석이다. 반면 그는 두 영화 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 교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아무도 모른다’를 “고레에다 감독 영화 중 상위 3등 안에 드는 작품”으로 꼽았다.

특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하 교수가 매우 인상적으로 본 영화다. 201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영화는 여섯 살 된 아들 ‘게이타’가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된 남자 ‘료타’의 이야기다.


핏줄이 같아야만 가족인가

아내, 아들과 함께 도쿄 중심가 최고급 맨션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건축가 료타는 어느 날 “출산 당일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알고 보니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 ‘류세이’는 시골에서 전파사를 운영하는 가난한 부부 집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동안 아들로 여기고 기른 게이타는 바로 그 전파사 부부의 아들이다. 병원 측은 “이런 일이 발생하면 부모들은 자녀를 ‘맞교환’한다”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하루라도 빨리 서로의 아이를 바꾸라”고 권한다. 경마에 빠져 사는 료타의 아버지 또한 같은 의견이다. 그는 “이건 피에 대한 이야기”라며 “사람도 말과 마찬가지로 혈통이 중요하다. 아무리 떨어져 살아도 류세이는 점점 널 닮아갈 테고 게이타는 점점 제 부모를 닮아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른 정’과 핏줄 사이에서 갈등하는 료타의 이야기는 최근 ‘블루엘리펀트’ 출판사에서 동명의 소설로도 출간됐다.

고레에다 감독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던진 질문은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피’인가 아니면 함께한 시간인가’다. 이 영화에서 료타는 물음의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한다. 반면 료타의 안타고니스트(적대자) 격인 ‘유다이’는 상대적으로 분명한 관점을 갖고 있다. 게이타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류세이의 법적 아버지인 그는 아버지의 제 1 덕목으로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꼽는다. 그리고 처음엔 핏줄 쪽에 좀 더 마음이 끌리던 료타 또한 점점 유다이의 생각에 공명해간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한 장면.
최근 개봉한 영화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감독의 이 메시지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어느 가족’에서 한집에 모여 사는 여섯 명은 모두 핏줄이 다르다. 혈연관계가 전무하다.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험금조차 못 받는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 세탁공장에서 일하다 시급이 비싸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노부요’,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아키’, 파친코 주차장에 버려진 차에 방치돼 있던 ‘쇼타’, 그리고 친부모의 학대를 받던 ‘유리’가 어떻게 법적으로 독거 노인인 ‘하쓰에’의 집에 모여 살게 된 건지, 이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한집에 모여 각각 아버지, 어머니, 이모, 아들, 딸 그리고 할머니로서 ‘가족’을 구성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피가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다. 그들은 같은 냄비에 들어 있는 음식을 먹고, 살을 비비고 잠이 들며, 일상적인 배려와 사랑을 나눈다. 그것이 이들을 가족으로 보이게 만든다.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공동체

고레에다 감독의 기존 영화 주인공들은 최소한 법적으로는 가족이었죠. 그런데 ‘어느 가족’에는 혈연뿐 아니라 법적으로도 가족이라고 볼 수 없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다른 ‘어느 가족’만의 특징이에요. 고레에다 감독은 그동안 법적으로 인정되는 가족의 기본 틀을 훼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가진 가족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내용적으로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다면, 법이나 혈연에 관계없이 진짜 가족 아닐까’라고 묻는 거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유다이를 료타의 대적자로 세운 고레에다 감독이 이번 영화에는 안타고니스트를 두지 않은 점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그래서 ‘어느 가족’을 보다 보면 영화 속 가족을 제외한 다른 가족, 즉 우리 모두의 가족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처럼 느껴집니다. 관객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거죠.”

교수님 말씀처럼, 사회 밑바닥에서 남루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함께 있을 때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영화 주인공들을 보면 자연스레 ‘진짜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가족’ 공동체가 법과 제도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대목 또한 생각할 거리를 주죠. 이 영화 배경은 일본이지만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제가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사례 중 하나는 환자가 입원할 때 ‘보호자의 보증’을 요구하는 겁니다. 보통은 우리 민법이 규정하는 특정 친족 범위 안에 있는 사람만 보호자가 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한 명뿐인 오빠는 먼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병원에 실려 왔다고 합시다. 이 환자 곁에는 10년간 ‘셰어하우스’에서 같이 살아온 오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환자를 매우 잘 알고, 치료 후 간호를 도맡을 생각이며, 만에 하나 치료비가 부족하면 대신 내줄 마음까지 갖고 있죠. 그래도 병원에서는 그 친구를 보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환자 오빠가 올 때까지는 수술을 안 해주는 거예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얼마 전에는 한 정신병원이 술에 취해 패악질 하는 알코올중독 환자를 긴급 입원시켰다가 기소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환자인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가 정말 아버지가 맞는지 관련 서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죠. 우리나라에서는 증명서에 올라가 있는 법적 가족만 어떤 사람을 보호하고 보증할 수 있다는 인식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괴롭히죠.”


이상한 정상가족

‘어느 가족’에서도 마찬가지다. 하 교수는 이 영화를 보며 김희경 씨의 책 ‘이상한 정상가족’을 여러 번 떠올렸다고 했다. “우리 사회의 가족중심주의가 갖는 문제점을 굉장히 객관적이고, 그래서 더 아프게 쓴 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통계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은 참 이상한 사회다.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계속 줄어들어 ‘국가소멸’을 우려하는 판국에 왜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를 버리며 해외입양을 보내는 걸까. 아동학대와 그로 인한 사망, 가정 내 아동학대는 줄어들지 않는가. (중략)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연결하는 단어로 ‘가족’을 꼽겠다. 한국만큼 ‘모든 사회 문제는 가족 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 교수가 크게 공감했다는 부분이다. 그는 “지난해 우리나라 가임기 여성의 합계 출산율이 역대 최저(1.05명)로 떨어졌다고 세상이 떠들썩했다. 그런데 관련 통계를 보면 기혼여성의 합계 출산율은 2.23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여성은 결혼하면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한 명도 낳지 않는다는 얘기”라며 “이는 우리나라의 가족중심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관련 통계를 찾아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비혼 출산율’은 2014년 기준 39.9%로 한국(1.9%)보다 21배 높다. 프랑스(56.7%), 노르웨이(55.2%), 덴마크(52.5%), 스웨덴(54.6%) 등은 전체 출산의 절반 이상이 비혼 출산이다.

우리나라가 유독 비혼모에 대한 편견이 심한 걸까요.

“김희경 씨 책 제목처럼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이 크죠. 시스템적으로 봐도 결혼과 출산을 한 덩어리로 여기고 ‘가족’을 모든 보건, 복지, 법적 보호의 근본으로 삼으니 비혼모가 곳곳에서 차별을 받습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직접 키우는 비혼모보다 버려진 아이를 돌보는 복지시설이 훨씬 많은 지원금을 받는 게 현실입니다.”

비혼모한테는 ‘당신이 엄마니까 자식을 스스로 책임지라’고 하는 거겠죠.

“그게 실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느 가족’에서 주인공 유리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어요. 유리의 엄마 아빠는 제 몸 가꾸고 자기 화 푸는 게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유리에 대해 ‘내가 낳고 싶어 낳은 아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기도 합니다. 그들로부터 학대를 당하다 오사무와 노부요 ‘가족’ 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 유리를, 나라는 굳이 구출해 친모에게 돌려보냅니다. 엄마한테 매를 맞든 학대당하든 그건 그 ‘가족’의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 행동의 근간에는 ‘아이는 부모의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 말 유사한 일이 있었다. 인천에서 열한 살 소녀가 부모의 감금과 학대를 피해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한 사건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소녀는 그 전에도 한 번 집을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해 도로 집에 데려다줬다고 한다. 이후 또다시 폭행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두 번째로 도망친 소녀가 이번엔 경찰과 마주쳤다. 이때 소녀는 집이 어디인지 묻는 경찰에게 ‘보호시설에서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또 집에 데려다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가족주의’의 환상이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른바 ‘동반자살’을 보도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도 문제 삼았다.

“생각해보면 아이가 부모와 같이 자살하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죠. 그걸 동반자살이라고 하는 건 일종의 미화입니다. 그조차 실패해 아이만 죽이고 자기는 살아남은 부모에게 온정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문제고요. 그들은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으면 보통 ‘내가 죽으면 남은 아이들이 불쌍해질 것 같아서’라고 답합니다. 저는 그 말이 ‘내 소유물인 아이를 주인 없는 존재로 남게 하느니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로 들립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걸 합리적인 생각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실은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잔혹한 거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느 가족’의 가족은 이런 현실 속 가족과 비교하면 오히려 이상적이죠. 개개인이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고, 각자 원해서 자발적으로 같이 살아가니까요.”


실체 없는 모성 신화이 영화에서 주인공 노부요는 유리를 유괴한 것 아니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부모가) 버린 아이를 주운 것뿐’이라며 ‘아이를 낳기만 하면 다 엄마가 되느냐’고 되묻는다. 하 교수는 이 질문도 우리 사회가 한 번쯤 곱씹어야 할 주제로 꼽았다.

“몇 년 전 게임 중독에 빠진 부모가 자녀를 방치한 끝에 아이가 굶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사람들은 가해자를 정상적인 인간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아주 예외적인 돌연변이 정도로 취급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이를 대여섯 명씩 낳고 기르면서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부모 될 준비가 아예 안 된 채로 아이를 낳아 방치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합니다. 부모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은 겁니다. 지역아동센터 같은 데 가보면 초등학교 3, 4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도 못 깨우친 아이가 무척 많아요. 대부분 부모가 어린 나이에 준비 없이 자녀를 낳은 뒤 책임지지 않고 방치한 아이들입니다. 이런 현실을 간과하고 ‘모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와 살 때 가장 행복하다’ 같은 관념을 신성불가침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료타 등이 출생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일 때다. 병원 측 변호사는 료타의 아내에게 “병원에서 실수 했더라도 당신이 주의를 기울였다면 아이가 바뀐 걸 알았을 게 아닌가”라고 추궁한다. “어머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하 교수는 이러한 모성에 대한 신화가 인류 역사와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의 삶에서 어머니 혼자 또는 부모 두 사람이 자녀를 책임지고 키운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불과 근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어느 가족’ 속 가족처럼 부모 형제를 넘어 조부모와 이모 삼촌 등까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확대 가족 안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얘기다.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집착

“이 영화를 통해 고레에다 감독이 전하고자 한 또 하나의 메시지는 그게 아닐까 싶어요. 이제는 보기 어렵게 된 조부모-부모-자녀 형태의 가족이 실은 현대사회에 적합하고 사람한테도 가장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형태일 수 있다는 거죠.

진화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생식을 멈추고도 수십 년을 더 사는 이유를 ‘돌봄’에서 찾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생산 활동을 할 때 그들의 부모 세대가 자녀를 맡아 돌봄으로써 문화를 전수하고 다음 세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노인의 존재 이유라는 겁니다. ‘어느 가족’에서 할머니가 바로 그런 구실을 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 들어 핵가족이 일반화하면서 이런 방식의 가족 구조를 보기 어려워졌고, 그것은 현대인의 삶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의 공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모든 것이죠. 현재 공교육 커리큘럼은 확대가족이 함께 사는 구조를 전제로 짜여 있어요.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은 가르치지만, 집단구조 내에서 개인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 되는지, 다양한 권위 체계가 존재할 때 무엇을 따를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과거엔 가족 안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습득했던 것들이 지금은 아예 배울 기회조차 없어요. 그 영향으로 부족해진 것을 어떤 사람은 인성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성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공동체 의식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건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부분에 거대한 블랭크를 가진 어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 사회문제가 된 이른바 ‘진상질’이나 ‘묻지 마 폭력’ 등의 바탕에는 바로 이 공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 교수는 특히 ‘고학력 엘리트’에게 이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안 한 사람은 어릴 때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며 사회성을 기른다. 반면 성공하려고 공부만 한 사람들은 사회성이 더욱 떨어진다. 최근 일부 판사가 대중 일반의 정서와 괴리된 판결을 내놓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의대 전공의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똑똑한 애들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교과서적인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그러고 보면 ‘어느 가족’에 등장하는 기자나 수사관들도 그렇습니다. 왜 이 가족이 모여 살았는지, 그들 사이에 어떤 유대가 존재했는지 알아보려 하지 않고 위법 사실과 범죄 전과에만 관심을 두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 주인공들이 저지른 행동은 절도, 갈취, 손괴, 유괴 등 하나같이 범죄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함으로써 이들이 우리 사회에 큰 피해를 끼쳤는지 묻는다면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5명의 ‘가족’에게 자기 집과 연금을 내주며 살았던 하쓰에가 죽기 직전 혼잣말로 ‘모두들 고마워’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 하쓰에의 말년은 자기 몫을 나눠 가질 다른 이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행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방치하거나 학대하던 친부모를 떠나온 쇼타나 유리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영화 주인공들은 좀도둑질에 대해서도 남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죠. 예를 들면 오사무가 ‘가게에 있는 물건은 남의 소유가 되기 전엔 모두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극중 엄마 격인 노부요는 아들 격인 쇼타에게 ‘남이 망하지 않을 정도까지 훔치는 건 괜찮은 게 아닐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척이나 공동체적인 사고방식이죠. 이들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마치 옛날에 우리가 참외서리 정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처럼요. 이 영화의 문구점 할아버지도 아이들이 과자를 슬쩍슬쩍 집어가는 걸 알면서 일부러 눈감아줘요. 그런 대목을 보면 고레에다 감독의 지향은 참 고전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 문구점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죠. 마치 한 시대의 종언처럼 말입니다.

“네. 그 후 쇼타는 현대식 슈퍼마켓에서 좀도둑질을 하다 결국 걸리게 되죠. 아이가 겨우 양파 한 망을 훔쳐 달아나는데 그 슈퍼의 젊은 직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쫓아갑니까. 영화를 보며 ‘저렇게 따라갈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편이 가게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직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쇼타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죠. 아마 그들은 좀도둑을 끝까지 잡아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는 게 정의롭고 공평한 행동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회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정의와 공정성에 목매게 돼요. 그런 면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근본주의, 원리주의가 나타납니다. 21세기에 왜 IS가 생기고 자생적 테러리즘이 발호하는가. 저는 슈퍼마켓 점원들의 모습에 그 대답이 있다고 봅니다.”

교수님은 온 힘을 다해 정의를 구현한 점원들보다 ‘다른 사람에게 큰 손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면 좀도둑질 정도는 괜찮아’라고 생각하는 ‘어느 가족’ 구성원들에게 더 호의적이신 걸로 보입니다.

“네, 그렇죠. 제가 이 영화에서 또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쇼타가 추락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뒤의 이야기입니다. 범죄와 비밀로 묶인 이 가족의 실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쇼타만 두고 도망을 치려 합니다. 만약 이들이 가족에 대한 근본주의적인 신념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을 거예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들은 애초부터 가족에 대해 종교 수준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혹은 좀 더 편안하고 즐겁게 살고자 그저 함께 지냈을 뿐이에요. 그러니 생존이 위협당하는 순간 ‘쇼타는 다음에 데려오면 되니까’ 하고 합리화하면서 도망칠 짐을 꾸릴 수 있는 겁니다. 저는 그 부분이 또 한번 우리 사회의 가족에 대한 신화를 깨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아주 착하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습니다. 거대한 이상보다는 자기가 가진 욕망이 더 중요한 존재죠. 그 안에서 비록 차선으로 보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최선인 삶을 선택해 살아가는 겁니다.”

거대한 이상이라는 게 때로는 폭력적일 수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윤리적이려고 노력하거나 정의로움과 공평함에 집착하지 않는 게 좋다고 봅니다. 삶의 목표를 ‘최악이 되지는 말자’ 정도로 정하면 최선을 추구할 때보다 훨씬 큰 영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가족에 대한 부분도 이렇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반드시 모여 살아야 해’ ‘자녀는 친부모가 키워야 해’ 같은 ‘이상’을 버리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면서 제도적·법적인 문제점을 개선할 때가 됐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서툰 면이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시스템이 개발돼도 끝까지 거부하다 많은 사람이 다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죠. 지금 우리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 또한 그렇게 낡은 것이 아닌가 돌아볼 때입니다. ‘어느 가족’은 그런 고민을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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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July 20, 2018

“北, 백성 중시 지도자 출현” 이낙연 총리, 김정은 칭송



“北, 백성 중시 지도자 출현” 이낙연 총리, 김정은 칭송

“北, 백성 중시 지도자 출현” 이낙연 총리, 김정은 칭송

홍주형
2018.07.20. 19:13

이낙연 국무총리가 19일(현지시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겨냥해 “(북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백성의 생활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가 마침내 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는 아프리카 순방 첫 방문국인 케냐 일정 중 나이로비 빌라 로사 켐핀스키 호텔에서 개최한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최근 한반도 안보 상황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리는 “평화를 정착시키고 번영의 길로 들어서야만 한다는 데 남도, 북도 의견차가 크지 않아 보인다”며 “남쪽은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크게 변한 것은 북일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군사 우선 정책노선에서 경제 우선 정책노선으로 선회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 제공: The Segye Times 풀/아프리카 순방 이낙연 총리 "

이낙연 총리(왼쪽), 유시민 前 장관




이 총리는 “체제의 제약이나, 권력의 속성이 갑자기 사라지겠냐만은 경제발전과 민생의 향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북이) 변하는 것은 틀림없다”며 “북한의 지도자나, 지도부에 있는 분들이 경제를 우선시하고 민생을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정책의 큰 전환을 이루고 있다면 그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김 위원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유 전 장관은 전날 ‘대한상의 제주포럼’ 강연에서 “김 위원장은 20대 후반 아버지를 잘못 만나 권력자가 됐고 지금도 어린 나이”라며 “큰 기업의 2·3세 경영자 중 김정은만 한 사람이 있냐고 묻고 싶다.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더 혁신하려는 경영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향후 30~40년간 누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김정은은 권력을 다르게 쓰려고 한다”며 “이런 게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Sunday, September 11, 2016

North Korea, Far From Crazy, Is All Too Rational - The New York Times

North Korea, Far From Crazy, Is All Too Rational - The New York Times

North Korea, Far From Crazy, Is All Too
Rational
The Interpreter
By MAX FISHER SEPT. 10, 2016
Is North Korea irrational? Or does it just pretend to be?
North Korea has given the world ample reason to ask: threats of war,
occasional attacks against South Korea, eccentric leaders and wild­eyed
propaganda. As its nuclear and missile programs have grown, this past week with
a fifth nuclear test, that concern has grown more urgent.
But political scientists have repeatedly investigated this question and, time
and again, emerged with the same answer: North Korea’s behavior, far from
crazy, is all too rational.
Its belligerence, they conclude, appears calculated to maintain a weak,
isolated government that would otherwise succumb to the forces of history. Its
provocations introduce tremendous danger, but stave off what Pyongyang sees as
the even greater threats of invasion or collapse.
Denny Roy, a political scientist, wrote in a still­cited 1994 journal article that
the country’s “reputation as a ‘crazy state’” and for “reckless violence” had
“worked to North Korea’s advantage,” keeping more powerful enemies at bay. But
this image, he concluded, was “largely a product of misunderstanding and
propaganda.”
In some ways, this is more dangerous than irrationality. While the country
does not want war, its calculus leads it to cultivate a permanent risk of one — and
prepare to stave off defeat, should war happen, potentially with nuclear weapons.
That is a subtler danger, but a grave one.
Why scholars believe North Korea is rational
When political scientists call a state rational, they are not saying its leaders
always make the best or most moral choices, or that those leaders are paragons of
mental fitness. Rather, they are saying the state behaves according to its
perceived self­interests, first of which is self­preservation.
When a state is rational, it will not always succeed in acting in its best
interests, or in balancing short­term against long­term gains, but it will try. This
lets the world shape a state’s incentives, steering it in the desired direction.
States are irrational when they do not follow self­interest. In the “strong” form of
irrationality, leaders are so deranged that they are incapable of judging their own
interests. In the “soft” version, domestic factors — like ideological zeal or internal
power struggles — distort incentives, making states behave in ways that are
counterproductive but at least predictable.
North Korea’s actions, while abhorrent, appear well within its rational selfinterest,
according to a 2003 study by David C. Kang, a political scientist now at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At home and abroad, he found, North
Korean leaders shrewdly determined their interests and acted on them. (In an
email, he said his conclusions still applied.)
“All the evidence points to their ability to make sophisticated decisions and
to manage palace, domestic and international politics with extreme precision,”
Mr. Kang wrote. “It is not possible to argue these were irrational leaders, unable
to make means­ends calculations.”
Victor Cha, a Georgetown University professor who served as the Asian
affairs director on George W. Bush’s National Security Council, has repeatedly
argued that North Korea’s leadership is rational.
Savage cruelty and cold calculation are not mutually exclusive, after all —
and often go hand in hand.
States are rarely irrational for the simple reason that irrational states can’t
survive for long. The international system is too competitive and the drive for
self­preservation too powerful. While the North Korean state really is unlike any
other on earth, the behaviors that make it appear irrational are perhaps its most
rational.
North Korea’s rational irrationality
North Korea’s seemingly unhinged behavior begins with the country’s
attempt to solve two problems that it took on with the end of the Cold War and
that it should have been unable to survive.
One was military. The Korean Peninsula, still in a formal state of war, had
gone from a Soviet­American deadlock to an overwhelming tilt in the South’s
favor. The North was exposed, protected only by a China that was more focused
on improving ties with the West.
The other problem was political. Both Koreas claimed to represent all
Koreans, and for decades had enjoyed similar development levels. By the 1990s,
the South was exponentially freer and more prosperous. The Pyongyang
government had little reason to exist.
The leadership solved both problems with something called the Songun, or
“military­first,” policy. It put the country on a permanent war footing, justifying
the state’s poverty as necessary to maintain its massive military, justifying its
oppression as rooting out internal traitors and propping up its legitimacy with the
rally­around­the­flag nationalism that often comes during wartime.
Of course, there was no war. Foreign powers believed the government would,
like other Soviet puppets, fall on its own, and barring that wanted peace.
So North Korea created the appearance of permanently imminent war,
issuing flamboyant threats, staging provocations and, sometimes, deadly attacks.
Its nuclear and missile tests, though erratic and often failed, stirred up one crisis
after another.
This militarization kept the North Korean leadership internally stable. It also
kept the country’s enemies at bay.
North Korea may be weaker, but it is willing to tolerate far more risk. By
keeping the peninsula on the edge of conflict, Pyongyang put the onus on South
Korea and the United States to pull things back.
From afar, North Korea’s actions look crazy. Its domestic propaganda
describes a reality that does not exist, and it appears bent on almost provoking a
war it would certainly lose.
But from within North Korea, these actions make perfect sense. And over
time, the government’s reputation for irrationality has become an asset as well.
Scholars ascribe this behavior to the “madman theory” — a strategy, coined
by no less a proponent than Richard M. Nixon, in which leaders cultivate an
image of belligerence and unpredictability to force adversaries to tread more
carefully.
Dr. Roy, in an interview, said North Korea “intentionally employs a posture
of seemingly hyper­risk acceptance and willingness to go to war as a means of
trying to intimidate its adversaries.”
But this strategy works only because, even if the belligerence is for show, the
danger it creates is very real.
Is a rational North Korea more dangerous?
In this way, it is North Korea’s rationality that makes it so dangerous.
Because it believes it can survive only by keeping the Korean Peninsula near war,
it creates a risk of sparking just that, perhaps through some accident or
miscalculation.
North Korea is aware of this risk but seems to believe it has no choice. For
this reason, and perhaps because of the United States­led invasion of Iraq and the
NATO intervention in Libya against Col. Muammar el­Qaddafi, it appears to
earnestly fear an American invasion. And this is rational: Weak states that face
more powerful enemies must either make peace — which North Korea cannot do
without sacrificing its political legitimacy — or find a way to make any conflict
survivable.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some analysts believe, is designed to halt an
American invasion by first striking nearby United States military bases and South
Korean ports, then by threatening a missile launch against the American
mainland. While North Korea does not yet have this ability, analysts believe it will
within the next decade.
This is the culmination of North Korea’s rationality, in something known as
desperation theory.
Under this theory, when states face two terrible choices, they will pick the
least bad option — even if that choice would, under normal conditions, be too
costly to consider.
In North Korea’s case, that means creating the conditions for a war it would
most likely lose. And it could mean preparing a last­ditch effort to survive that
war by launching multiple nuclear strikes, chancing a nuclear retaliation for the
slim chance to survive.
North Korea’s leaders tolerate this danger because, in their calculus, they
have no other choice. The rest of us share in that risk — vanishingly small, but
nonzero — whether we want to or not.
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s in print on September 11, 2016, on page A6 of the
New York edition with the headline: North Korea Crazy? Worse. It’s Calculating.
© 2016 The New York Times Company